고등학교 2학년 때다. 5월 초순, 체육대회가 끝나고 책방에 갔다. 유재가 먼저 도착해서 책을 보고 있었다. 주문했던 식물도감이 도착한 모양이다. 「퇴마록, 혼세 편」을 샀다.

 

체육대회 하는 날은 시내 중심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학생 할인을 한다. 단돈 천 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오늘 상영하는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 애석하게도 중간고사 끝난 날, 유재와 본 영화였다. ‘어딜 갈까?’ 잠깐 고민하던 우리는 만두와 떡볶이를 먹기로 의기투합했다. 중앙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걸어가도 10분이 채 안 걸린다.

 

시장 입구에서 반장을 마주쳤다. 그는 여학생과 다정하게 손잡고 시장을 올라오고 있었는데, 우리와 맞닥뜨리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영화 안 봐?”

? . 니네는?”

우리는 접때 봤지.”

 

씨익! 반장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줬다.

 

낼 봐.”

…, …, 그려.”

 

다음날, 반장은 우리에게 비밀을 지켜 달라.’고 했다. 그러면 기말고사 끝나고 미팅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


 

--- ** --- ** ---


 

찬샘아. 근데 미팅은 어떻게 하는 겨? 빵집에서 우유 먹고 빵 먹고 그러나?”

으이구. 무슨 추억의 책가방찍냐? 밤새 다이아몬드 스텝 연구라도 한 겨?”

 

토요일 아침, 보충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유재의 영혼은 학교와 미팅 장소를 오갔다. 경험이 있는 척 면박을 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반장이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기에 다른 친구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나우누리 게시판을 훑었지만, 글 대부분이 음주 관련한 소개팅 폭망 사연이거나, 시골 소도시에서 찾기 어려운 카페테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우리에게 별 영양가 없는 내용이었다.

 

학교 앞에서 유재를 만나 약속장소에 같이 가기로 했다. 오후 두 시 이십오 분, 한껏 멋을 내고 정문 앞에 서 있는 유재가 보였다. 흰색 반팔 티셔츠 위에 연한 분홍색 남방을 걸쳤다. 처음 보는 하얀 르까프 운동화에 머리는 무스라도 발랐는지 반들반들 윤이 났다.

 

이야! 이게 누구여. 웬 멋쟁이 신사가 다 있어.”

왜 그려어. 늦겠다. 얼른 가자.”

 

유재가 멋쩍게 웃으며 재촉했다.

 

찬샘아. 나 청심환 먹었다.”

? ? 그렇게 떨려?”

미치것어. 이거 봐바.”

 

유재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걱정하지 말어. 엉아만 믿어.”

 

약속장소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지하상가 앞. 유재는 다리가 후들거려 못 걷겠다고 택시를 타자고 자꾸 보챘다.

 

쫌만 참어봐. 여기는 택시도 잘 안 오는 데여.”


 

--- ** --- ** ---


 

우리가 도착했을 때, 반장은 벌써 와 있었다. 약속 시각 십 분 전이었다. 반장이 데려온 여학생들과 인사를 나눴다.

 

뭐 먹을래? 달라스 갈까?”

 

순간 유재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지금껏 청심환 이야기만 하며 온 터였다.

 

거기 이제 맛없지 않아?”

맞어. 그냥 비빔만두 먹자.”

그게 낫겠다.”

 

여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쑥덕대다 메뉴를 정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지하상가 안, 여학생들이 이끄는 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반장이 다시 우리를 소개했다. 그런데 설명이 상당히 과장되었다. 이 녀석이 자기 여자친구와 그 친구들 앞에서 멋있어 보이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자꾸 우리 얼굴에 금칠해서 듣기 거북했다. 나를 전국을 아울러 손꼽히는 수재로, 유재를 해동검도와 학업 어느 쪽도 빠지지 않는 문무겸전의 천재로 만들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반장을 쳐다보자 그가 애타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어쩐지 자기가 하는 대로 가만두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기에 이상하다 싶더라니…. 여학생들의 소개도 우리와 비슷했다. 한 명은 A 여고에서 1~2등을 다툰다고 했고, 다른 하나는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음악 신동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음대 교수에게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 이제 커플을 결정해야지.”

잠깐만! 오늘은 그냥 이렇게 다 같이 만나면 안 될까?”

 

당황했는지 유재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가게 안, 다른 손님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 나는 좋아.”

나도 괜찮아.”

 

여학생들이 쿨하게 동의했다. 나도 내심 좋았다.

 

니네 가수 누구 좋아해.”

한대수.”

나는 김광석

 

정적이 흘렀다.

 

요즘 가수들은 없어? 룰라, 박미경, 서태지와 아이들…. 많잖아.”

우린 신승훈 팬이야.

저기, 김광석은 옛날 가수가 아닌ㄷ…….”

그럼 우리 이거 먹고 노래방 갈까?”

 

김광석이 어째서 옛날 가수란 말인가. 항변하려는 순간, 반장이 툭 끼어들어 내 말을 끊었다.

 

노래방? 진짜?”

우와!”

좋아! 좋아!”

 

여학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 ** --- ** ---


 

나와 유재가 수재, 천재가 아닌 것처럼 여학생들도 노래방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우리는 가끔 만나 분식을 먹거나 노래방에 가서 소리를 질렀다. 반장과 유재는 여학생들과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내게도 같이 가자고 권했는데, 나는 도서관보다 집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좋아서 거절했다. 만남은 초겨울까지 이어지다가 3학년이 되면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일 년 후 어느 봄, 유재가 멀리 인천에서 찾아왔다. 오락실에서 신나게 놀고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내가 다니는 학교를 구경하고 싶어 해서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아는 대로 모르는 대로 마구 지껄였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여 기분이 들떴다. 오늘 내 방에서 하루 자고 가기로 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저녁 먹으며 맥주를 마실 때였다.

 

찬샘아. 너 혹시 지현이 학교 어디 갔는지 아는 거 있어?”

지현이?”

우리 2학년 때 미팅했던 애 있잖어.”

! ! 모르지. ? 따식이한테 물어보면 되잖어.”

따식이도 모른댜.”

 

따식이는 2학년 때 반장 별명이다.

 

근데 걔는 왜 찾는 겨.”

같이 교대 가기로 했거든. 대학 가서 사귀기로 했는데, 연락처를 모르겠네.”

너 교대 간 게 걔 때문이여?”

아녀. 내가 맘이 있으니께 갔지, 그냥 갔겄냐.”

 

수수께끼가 풀렸다. 작가가 꿈이어서 국문과나 문창과를 가고 싶어 했던 유재가 돌연 진로를 교대로 틀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아니, 뭐어 나는…, 작가가 되겠다고 그르~케 노래를 부르던 우리 유재가 언날 갑자기 교대를 간다고 혀서 크~~ 꿈이 있는 줄 알었지이! 근데 그거여? 이유가 그건겨?”

아녀, 아니라고. 아니라는데 왜 자꾸 그려어.”

 

정색하고 부인하는 유재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한참을 놀렸다.

맥주 마신다는 소리에 냉큼 달려온 김여사가 우리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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