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를 떠났던 26개월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학교가 낯설었다. 학생증을 재발급받아야 했고, 교양 필수 과목이 바뀐 줄 모르고 수강 시간표를 짰다가 나중에 정정하느라 애를 먹었고, 중앙도서관 자료실에 가방 메고 들어갔다가 원시인 취급을 받았다. 친구들은 바빴다. 꿈과 미래를 명확하게 그렸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냈다. 나는 어리바리했다. 뚜렷한 목표 없이 흘러가는 대로 시간을 보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들 열심히 사는데, 혼자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역 후 맞이하는 첫 가을이었다.

 

산을 찾았다. 문득 찾아오는 잡념을 떨치기에 등산이 좋았다.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다 보면 어제 했던 걱정이 아무것도 아닌 듯 가볍게 느껴졌다. 숲에 걱정 요정이 살고 있어, 내 마음을 살펴보고 근심을 가져가는 것 같았다.

 

대학 친구 ‘폭탄’은 여태 연애를 못 했다. 엄마가 ‘대학 가면 연애할 수 있다.’고 했다는데, 아니었다. 남들 다 하는 연애를 못 하고 졸업하게 생겼다. ‘이러다 평생 연애 못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불안했다.

 

“내일 뭐 해?”

“수락산에 다녀오려고.”

“왜?”

“산에 다녀오면 마음이 가벼워지거든.”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말에 폭탄은 귀가 솔깃했다. “나도 같이 가자!” 아직 한낮의 햇볕이 여름의 기운을 강하게 뿜어내는 9월의 금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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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말야, 대학 오면 연애도 하고 대학가요제에도 나가고 막 그럴 줄 알았다? 엄마가 그랬거든. ‘대학 가면 여자친구 생긴다.’고. 근데 연애가 공부보다 더 힘들 줄 누가 알았냐. 이건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냐. 에휴…. 실은 잘한다는 게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산을 오르는 내내 폭탄은 연애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깔딱고개까지 오르는 등산로가 계단 구간이어서 꽤 힘이 드는데, 그는 숨을 헐떡대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주말 오전, 등산객이 많은 시간이어서 쉼 없이 연애의 고단함을 떠벌리는 그가 조금 부끄러웠다.

 

깔딱고개에 올랐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골랐다. 여기부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가파른 바윗길이다. ‘어떡하지?’ 난감했다. 폭탄은 수락산을 동네 뒷산으로 생각했는지 운동화를 신고 왔다.

 

“야. 저기 오르는 사람들은 뭐냐?”

“저기가 등산로야. 우리도 저기로 가야 해.”

“엥? 저기로 간다고? 안돼! 나 고소공포증 있어!”

 

잘됐다. 간다고 했으면 곤란할 뻔했다. 깔딱고개 한켠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김밥과 막걸리 한 병을 나눠 먹었다.

 

“올라올 때 보니까 계곡 있더라. 우리 거기서 놀다 가자.”

“좋지.”

 

오후로 접어들자 더위가 산을 타고 올랐다. 그리 힘들지 않은 하산 길인데도 연신 땀이 흘렀다. 옷은 이미 흠뻑 젖었다. 계곡에 다다르자 폭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자!” 계곡은 물놀이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폭탄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잠깐! 기다려!” 아뿔싸! 한발 늦었다. 첨벙! 제지할 틈도 없이 그가 물로 뛰어들었다. “야! 너 휴대폰 어딨어!” 폭탄은 낭패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휴대폰을 넣은 가방을 물이 튀지 않는 곳에 잘 두고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그 위에 포갰다. 물가에 앉아 발만 담그고 나름 더위를 식히는데, 시커먼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어디서 몸을 사려!” 폭탄이었다. 그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를 계곡으로 끌어당겼고, 느닷없이 계곡에 몸이 던져진 나는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폭탄을 찾았다. 그는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이 개놈 시키!” 그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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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놀고 하산하는 길, 끝없이 떠드는 폭탄의 목소리가 이상해서 돌아보니 입술이 보랏빛이었다. “추워?”, “아니.” 그는 오들오들 떨며 춥지 않다고 잡아뗐다. “안 되겠다. 따뜻한 거부터 먹자.”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순댓국집으로 들어갔다. 순댓국을 시키는데, 주문받으시는 아주머니가 우리의 얼굴을 보고 “학생들 얼굴이 우째 그래?” 걱정했다.

 

“수락산 갔다가 계곡에서 물놀이하고 오는 길인데요, 조금 으슬으슬하네요.”

“아이고, 안 되겠다. 이리 와.

 

아주머니가 우리를 주방으로 데려가더니 가스 불 앞에 세웠다.

 

“일단 여기서 몸 좀 녹여.”

 

몸에 온기가 돌았다. 아! 좋다. 세상 근심 걱정이 뭐 있나, 싶다. “좋다.” 폭탄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지?”

 

순댓국을 먹고 나왔다. 이대로 떠날 수는 없다. 약국에서 박카스를 사서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아니, 학생들이 뭐 이런 걸 사 갖고 와. 도루 갖구 가!”

“사장님 아니었으면 저희 길에서 쓰러졌을지도 몰라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데, 사장님은 별것도 아닌 일로 그런다며 손사래를 친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나는 이런 호의를 누군가에게 베풀어본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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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탔다. 친구와 첫 산행인데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 폭탄도 그런 눈치다. “술이 부족했어. 그지?”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 내려서 한잔 더 할까?”, “좋지!” 다음 정거장에서 무작정 내렸다. 안내도를 보며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내가 찍기에는 일가견이 있지! 따라와!” 이상한 자신감으로 무장한 폭탄이 앞장섰다.

 

어디가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며 돌아다니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꼼장어 집이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개업 축하 화환이 출입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꼼장어 2인분과 소주를 시켰다. 숯불이 들어오고 그 위 불판에 자리 잡은 꼼장어가 몸을 비비 꼬았다.

 

“찬샘아. 나는 말이지, 대학만 들어가면 인생 꽃필 줄 알았다? 연애도 하고…….”

 

온종일 지겹게 들었던 레퍼토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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