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이었다. 스님은 지게를 추슬렀다. ‘너무 욕심을 부렸나?’, 바짝 마른 가지만 주워 담았는데도 지게가 제법 무거웠다. 서둘러야 한다. 산골의 어둠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지겟작대기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좁은 산길을 오르는데, 어디서 인기척이 났다. 해는 벌써 지고 한 뼘쯤 되던 노을도 내려앉아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남았다. 나무꾼도 약초꾼도 모두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갔을 시각, 중턱을 넘어 정상에 가까운 이곳에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됐다. 혹 길을 잃은 사람인가 싶어 나무를 헤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녀가 무덤가에 앉아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침쟁이 곽 씨의 산소 앞이었다.
“누구유? 산이 험한데 어뜨케 내리갈라구 안즉까지 이러고 있대유.”
“양짓말 처가에 갔다가 집에 가는 길인데, 아부지 산소에 잠깐 들른다고 왔다가 그만, 해가 졌지 뭐예유. 인제 일어나야쥬.”
“집이 어디유?”
“서당골이유.”
“아이구. 그믐이라 달도 안 뜨는데, 거까지 심들어서 어뜨케 가유. 그러지 말구 우리 절에 가서 하룻밤 자구 가유.”
“괜찮어유. 맨날 다니는 길이라 달이 없어두 훤해유.”
스님은 젊은 부부가 걱정되었지만, 완전히 캄캄해지면 자기도 산을 오를 자신이 없어 그들을 남겨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비탈길을 조심조심 오르는데, 누가 자꾸만 지게를 당기는 것 같았다. 통 길이 줄지 않았다. 꼭 뭔가를 빠뜨린 것 같고 이상하게 기분이 찝찝했다.
문득 뭔가 번뜩 떠올랐다. 맞다! 침쟁이 곽 씨에게는 자식이 없다. 그는 일찍 상처(喪妻)하고 평생을 홀로 살았다. 장례를 치를 가족이 없어 몇 번 치료받은 인연으로 장례도 스님이 주관하고 묏자리도 스님이 쓴 터였다.
돌이켜 생각하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산중에 오른 사람치고 옷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사내의 새하얀 두루마기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눈동자도 빨갛고, 크고 뾰족한 귀는 실핏줄이 다 비쳐 생김새도 수상했다. 게다가 그의 아내라는 소녀는 스님이 말을 거는데도 초점 없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다시 가봐야겠다.’ 지게를 나무에 기대놓고, 아까 그 사내를 만났던 곳으로 살금살금 내려갔다. 저만치 점쟁이 곽 씨의 봉분이 보였다.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사내와 소녀가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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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하얗고 커다란 토끼가 소녀를 희롱하고 있었다! 퉤! 퉤! 양손에 침을 뱉고 지겟작대기를 단단히 쥐었다. “이놈!” 스님이 달려들어 지겟작대기로 토끼의 어깻죽지를 내려쳤다. 팍! 팍! 팍! “끼이~ 끼이~ 끼이~” 토끼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서너 걸음 쫓아가다 그만두고 돌아보니 아까 그 소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쏴아아~ 찬 바람이 스님의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난감했다. 말만 한 처자를 업을 수도 없고,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어둑한 산길을 오를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른 나뭇가지를 그러모아 작은 화톳불을 피웠다. 기절한 소녀를 불가로 옮기고 곁에 앉아 조용히 독경을 외우며 소녀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동녘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 무렵 정신을 잃었던 소녀가 깨어났다.
“정신이 들어유?”
“여그가 어디여라?”
그녀는 전남 바닷가 작은 마을의 양갓집 규수였다. 저녁나절 물을 긷고자 우물로 가는데, 털이 하얀 토끼가 깡충깡충 다가왔다고 한다. 귀여워서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라고 했다. 스님은 깜짝 놀랐다. 여기서 소녀의 집까지는 수백 리 길. 입성이 깔끔하고 몸에 활기가 도는 것을 보니 먼 길을 걷지는 않은 듯한데,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에 이 먼 길을 어떻게 왔을까. 그야말로 괴력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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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소녀와 스님은 남쪽으로 향했다. 소녀의 동네 어귀에 다다르자 요란하게 울리는 징과 꽹과리 소리가 먼저 그들을 맞았다. 그녀의 집은 굿이 한창이었다. 마당에 흰 천이 나부끼고 나이 든 무당이 아가씨 목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엄니~ 엄니~ 호랭이가…, 호랭이가 나를…….”
물을 길으러 나간 딸이 며칠째 행방이 묘연하자 소녀의 가족은 무당을 찾았다. 무당이 ‘호랑이가 물어갔다. 굿을 해서 혼을 달래야 딸이 손각시가 되지 않는다.’는 점괘를 내놓았고, 가족들은 ‘죽은 자식의 혼을 달랠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냐.’며 크게 굿판을 벌였던 거였다.
죽었다는 자식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자 그녀의 가족들은 기쁨과 경악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들을 맞았다. 스님이 자초지종을 말하자,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기쁨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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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근데 왜 토끼 귀신이 침쟁이 할아버지 산소로 여자를 데려왔을까요?”
“그게…, 그 침쟁이 곽 씨가 퇴끼 괴기라믄 사죽을 못 썼댜 1. 워찌나 퇴깽이 괴기를 좋아했는지, 거 먹으러 가자믄 자다가도 벌떡 인났다는 겨.”
“그럼 토끼 귀신이 복수한 거예요?”
“복수는 무신…. 염장 질를라고 그런 거지. 구신은 산 사람을 못 건디니께, 난중에 찾아와서 약 올린 겨. 침쟁이 곽 씨가 일찍 상처하고 죽을 때까지 홀애비였거든.”
콜록콜록. 다시 외할아버지의 기침이 터졌다. 당신을 바라보는 손자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외할아버지는 커다란 손을 내 머리에 얹고 쓱쓱 쓸었다. 그리고는 모과 한점을 썰어 입에 넣고 한참을 우물거렸다.
“가만있자…, 우리 손주가 좋아할 만한 얘기가 또 뭐가 있나……. 낭구 2 구신 얘기는 어뗘?”
“귀신 얘기는 무서워서 싫어요. 그냥 도깨비 얘기해주세요.”
부엉~ 부엉~ 또 부엉이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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