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중턱, 작은 평상이 놓인 공터에 이르러서야 지게를 내려놓고 땀을 식힐 수 있었다. 옹기전에 다녀오는 길이다. 달도 별도 숨을 죽인 고요한 밤, 삐이이, 삐이이. 소쩍새의 울음에 바람이 비탈을 내달리자 산허리에 하얗게 펼쳐진 메밀꽃이 몸을 흔들며 장단을 맞췄다. 시원한 바람과 춤을 추는 하얀 꽃과 달빛에 반짝이는 옹기가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크고 잘생긴 옹기를 헐값에 구했다. 옹기전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띄었는데, 별 시답잖은 옹기도 비싸게 불러서 흥정을 붙일 엄두가 안 났다. 쌈짓돈까지 털어 장에서 쌀을 팔고 차비가 부족해 집까지 사십 리 길을 걸어가야 할 판이어서 괜히 왔나 싶었다. 1
“뭐가 비싸유. 저번 장보다 떨어졌구만. 그럼, 이거 갖구 갈래유? 이건 그냥 쌀 두 되만 줘유.”
옹기장수가 외할아버지가 눈독을 들였던 옹기를 곰방대로 톡톡 두드렸다. 그야말로 불감청 고소원. 장사꾼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얼른 셈을 치르고 옹기를 지게에 얹었다. 어깨를 누르는 묵직함에 마음이 든든했다.
쏴아아.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아까까지 시원했던 바람이 이젠 한기를 일으켰다. ‘딱 한 대만 피우고 가자.’ 곰방대를 빨 때마다 빨간 불씨가 몸을 드러내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몸이 빠르게 데워졌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흐흐흐”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여.’ 어둠 속에서 휙 불이 치솟았다. 짐승의 눈동자인가 싶어 유심히 살피자 불이 사라졌다. 겁이 덜컥 났다. 오래전에 떠났다는 산군(山君)이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외할아버지는 지겟작대기를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낄낄낄”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리고 불이 치솟았다. 허공에서 너울거리던 불이 외할아버지 주위를 빙빙 돌았다. “히히히” 짐승인지 귀신인지 모를 무엇이 자신을 업신여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놈!” 불꽃으로 달려가 지겟작대기를 휘둘렀다. 퍽! 무엇인가 맞는 소리가 나긴 했는데, 손에는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얼른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기필코 맞추리라.
“아이구! 뭔 승질이 이렇게 지랄 맞어유! 장난두 못 치것네!”
뒤에서 누가 빽! 소리를 질렀다. 모습을 드러내는 큰 덩치의 털북숭이 사내. 도깨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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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여, 참 희한한 게, 도깨비를 만나믄 그 양반이 도깨빈지 몰러. 헤어지구 나서야, ‘맞다! 도깨비!’ 한다니께.”
몇 번을 만났지만, 한 번도 단번에 정체를 알아차린 적은 없었다. 다음날, 전날의 일을 곱씹고 나서야 ‘내가 도깨비를 만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씨름을 했을 때도, 손각시를 쫓아 주었을 때도, 돈을 빌려주었을 때도 황당한 양반이라고 생각했지, 도깨비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씨름 한판 해유!”
사내는 다짜고짜 씨름을 청했다.
“안 돼유. 지금도 늦었슈. 집에서 식구들이 지달려유.”
“아! 딱 한 판만 해유! 내가 지믄 그 지게 그짝 집까지 져다 드릴게.”
귀가 솔깃했다. 안 그래도 양어깨가 끊어질 듯 아프던 참이었다.
“그럼 딱 한 판만 하는 거유?”
“야.”
동네서 소문난 씨름꾼인 외할아버지는 코밑이 거뭇거뭇해진 이후로 씨름에서 져본 적이 없다. 숱하게 많은 사람이 허리춤을 붙들고 용을 썼지만, 바닥에 쓰러지는 건 늘 상대였다. 누구와 붙어도 자신 있었다.
하나, 둘, 셋!
큰 덩치가 무색하게 사내는 시작과 동시에 자기 힘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시 해유! 이건 뭔가 야로가 있는 겨.”
외할아버지가 발끈했다.
“허! 야로는 무슨...! 이 사람이 질바닥을 요 삼아 하늘을 이불 삼아 죙일 둔눠 봐야 정신을 차릴래나…. 억울하믄 또 뎀벼유!”
질 때마다 사내는 “한 판만 더해유!” 씩씩대며 도전해왔지만, 수십 판을 벌이는 동안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벌써 달이 산마루를 넘었다. 집에서 걱정할 가족 생각에 외할아버지는 바지를 툭툭 털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인자 됐슈. 그만해유. 지금 가두 집에는 달 떨어질 때나 도착하것네.”
“아니, 이기구 내빼는 게 어딨슈. 딱 한 판만 더 해유? 야?”
“그르케 하구두 힘을 어서 써야 하는지두 모르믄서 하긴 뭘 해유. 됐슈.”
“아, 그럼 알려주든가!”
사내가 떼를 썼다. 어휴!
외할아버지는 우는 아이 떡 주는 심정으로 씨름 기술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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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황톳길이다. 집까지 가려면 이런 둔덕을 몇 번을 더 넘어야 한다. 됐다고 하는데도 극구 고집을 부려 지게를 진 사내는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도 숨 한 번 몰아쉬지 않았고, 십 리가 넘는 산길을 걸으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 이르자 한껏 팔을 뻗은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어떤 장면이 외할아버지의 머리를 스쳐 지났다.
“접때 빌려 간 돈은 어째 함흥차사유?”
“야?”
“아니, 그짝이 술 마시겠다구 돈 빌려 가놓구선 소식이 없으니께 하는 말 아뉴.”
“아!”
사내가 이마를 탁! 쳤다.
“아이구! 미안해유. 깜빡했슈!”
지게를 받치고 품을 한참 뒤적이던 사내가 이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낼 주믄 안 될까유?”
“됐슈. 그 무거운 걸 여까지 져 날랐는데, 돈 얘기 꺼낸 놈이 미친놈이지. 품값이 더 나왔겠구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외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가 ‘이러면 되겠다.’며 나뭇가지 하나를 꺾더니 옹기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염병할 놈이 하나 들어앉았는데, 이놈이 여간 정신 사나운 놈이 아녀유. 장뚝간에 갖다 놓으믄 분명 지랄발광하믄서 사고 칠 건데 2, 그때 승질난다고 깨부시지 말고 이걸루 슬슬 쓸어줘유.”
사내는 외할아버지에게 나뭇가지를 건네고는 다시 지게를 지고 일어섰다.
“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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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아침을 먹는데 외할머니가 ‘요즘 밤에 자꾸 장꽝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3.’며 산짐승이 어슬렁거리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다. ‘아! 이거였구나!’ 외할아버지는 사랑(舍廊)으로 건너가 사내가 건네준 나뭇가지를 찾았다. 분명 잘 둔다고 여기 두었는데,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몽당빗자루였다.
다음 날, 아직 달빛이 창을 환하게 비추는데 한 번 잠에서 깨니 통 잠이 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오니 마당에 안개가 자욱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삐이걱. 대문을 열자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왜 이제 나와유!”
사내가 봇짐을 던지고 휙 돌아섰다. 덩치 큰 털북숭이, 도깨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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