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기, 1일 차(2022. 10. 16), 「얘! 하늘에 얼음이 떠 있어」

 

 

3호선 버터플라이, 「스물아홉, 문득」

 

 

스무 살, 스물한 살 그 언저리의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이 좋고, 술이 좋고, 문학이 좋았다. 그때 종종 어울렸던 친구 빡빡이는 술을 마시면,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다.’아직 치사하게 살아야 할 스무 해의 곱절은 남아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빡빡이는 자기 말을 지키지 못했다. 서른 중반의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등졌고 일산의 어느 추모공원에 스물, 스물하나 그 언저리쯤 찍은 사진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흔에 이르자 시간이 급속도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젠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은 나이가 되었다. 아침에 샤워하다 지키지 못한 약속 하나가 떠올랐다. 퇴근 후 빡빡이와 소주잔을 기울이다 다음 달에 춘천에 가자고 했었다. 비가 내렸고 창밖으로 서행하는 자동차의 빨간 미등이 예쁘게 보였고 민속주점 스피커에서 3호선 버터플라이의 '스물아홉, 문득'이 흘러나왔다.

 

~ 만큼을 더 가면, ~ 난 거의 예순 살.”

 

스물아홉, , 흐드러지게 핀 목련이 봄비에 휘청이던 밤이었다.

그때 왜 다음 달에 춘천에 가지 못했는지 생각이 안 난다. 어쩌면 빡빡이도 나도 우리에게 앞으로 쇠털같이 많은 날이 남아 있어 춘천 여행쯤은 그리고 술자리 약속쯤은 공간을 헛도는 담배 연기처럼 손으로 휘휘 저어 파투 낼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약속이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떠올라 마음을 아프게 할 줄은 몰랐다.

 

엄마하고 제주도에 가야겠어.’

 

출근 전, 동생에게 문자를 남겼다. 오래전에 어머니와 제주도에 가기로 약속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 내가 커서 돈 벌면 꼭 엄마 모시고 제주도에 갈게요!” 선언했었다. 별것도 아닌 얘기에 눈을 빛내며 듣는 어머니께 괜스레 미안해 튀어나온 말이었다. 배시시 웃으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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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의 청주 공항은 평일 시골의 기차역처럼 한산했다. 붐빌 것을 예상해 일찍 도착한 보람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 발권하고 2층으로 올라가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내 앞의 아가씨 가방에서 라이터가 3개가 나와서 잠시 지체가 되었다. “라이터는 기내에 한 개만 반입이 허용됩니다. 하나만 골라 주세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는데, 나도 한쪽으로 빠지라고 했다. -_-?

 

가방에 전자기기가 있는데 뭐냐고 물어서 태블릿 피씨라고 대답했다. 가방을 열어서 확인시켜주고 통과.

 

요즘 어머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나는 식사를 통 못하시는 어머니가 걱정이고, 어머니는 간밤에 맥주 한 캔 마신 아들, 혹여 아침에 해장국 못 먹일까 걱정에 이른 아침부터 미역국을 끓이셨다. 탑승 게이트 앞에서 대기하는데 어머니 눈이 가물가물 감긴다. 지금 주무시면 오늘 밤에 잠을 못 주무실 게 뻔하다.

 

엄마! 배고프죠? 이것 좀 드세요.”

 

 

 

 

집에서 챙겨온 청포도를 꺼냈다. 엄마 얼굴에 생기가 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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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이륙하자 동생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편두통이 찾아왔다고 했다. 이건 집안 내력이다. 약 먹고 10분이든 20분이든 눈을 붙여야 그나마 고생을 덜 한다.

 

창가에 앉은 어머니는 비행기의 작은 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을 오래오래 감상하셨다.

 

 

 

 

! 이거 봐. 밖에 얼음이 떠 있어!”

 

구름이 어머니의 눈에는 얼음으로 보인 모양이다.

 

그러네요. 얼음이 둥둥 떠 있어요.”

 

내가 맞장구를 치자 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해골을 굴리던 동생이 피식 웃었다.

 

엄마. 그게 구름이에요. 위에서 보니까 신기하죠?”

 

애가 나이를 먹더니 낭만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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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시각이었다. 일요일 오후, 방문하려고 적어 놓은 제주의 식당은 문을 닫았거나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오빠. 여기가 제주 맛집이래.” 동생이 급하게 검색해서 식당 하나를 찾았다. 그렇게 방문한 곳이 김만복 김밥.

 

 

 

 

김밥과 라면과 주먹밥을 주문했다. 나는 분식집에 가면 제육 덮밥, 순두부찌개만 먹는 인간이라 셋 다 별로였다. 김밥은 원래 안 좋아하고, 주먹밥 위의 숯불갈비는 식자재 마트에서 벌크로 파는 제품만 못했고 밥 알갱이는 따로 놀고 식감도 별로였다. 라면은 그나마 나았는데, 일부러 찾아와 이 돈 내고 먹을 만한 맛은 아니다.

 

제주시에서 남으로 남으로 달려 서귀포시에 닿았다. 독채 펜션을 빌렸다. 숙소는 아늑하고 정갈하고 따뜻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지 싶다.

 

 

 

 

오늘의 저녁은 순살 치킨. 서귀포 시내로 나가 장을 보고 주문한 닭을 찾아왔다.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늦었다. 어머니 다리에 약을 바르고 주물러 드리자 금세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잘 시간이다. 내일은 아쿠아리움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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