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시간에 찾아왔다.

출장 마지막 날이었다. 이번 일정은 시간이 짧았고 주어진 일은 많아서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자신을 스스로 몰아붙여야 했다. 마지막 날 오후, 이제야 숨돌릴 여유가 생겼다. 이른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그동안 고생했다.’고 서로서로 마음을 다독였다. 중간고사가 끝난 학생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술이 부족한 사람은 숙소로 돌아가 한 잔 더 하기로 했고, 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 시내를 돌아다녔다. 숙소로 복귀했을 때, 술판도 거의 끝물이었다. 마지막 잔을 들고 얼굴이 불콰해진 사람들이 낄낄거렸고, 막내 직원, 우람 씨가 휴지통을 들고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우람 씨. 운동한다고 아령 챙겨왔는데, 하나도 못 했네?”

 

웨딩촬영 날짜가 정해지자 우람 씨는 마음이 급했다. 갓 입사했을 때만 해도 군살 없는 날렵한 체구였던 그는 잦은 야근과 회식으로 어느새 배가 볼록한 아저씨 체형으로 변했다. 하여, 대학 때 몸매로 돌아가겠다고 회사에 아령을 가져다 놓고 틈만 나면 운동에 매진했다. 이번 출장에도 아령을 챙겨왔다.

 

맞다! 깜빡했어요!”

 

우람 씨가 아령을 꺼냈다. 아령을 한 손에 들고 팔을 접었다 폈다 하며 술자리를 정리하는데, 어째 영 불안했다. 알코올이 들어간 상태라 저러다 사고 나지 싶다.

 

여기 내가 정리할게. 저리 가서 운동해.”

에이. 괜찮아요. 어지른 사람이 정리해야죠. 보시다시피 치울 것도 얼마 없어요.”

아냐. 보기 영 불안해서 그래.”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 손에서 빠진 아령이 내 발등으로 낙하했다.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덮쳤다.

 

 

--- **--- ** ---

 

 

발등에 금이 갔다. 의사는 생활 리듬을 최대한 회복에 맞추어야 한다고, 회복이 늦으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친절한 어투로 협박의 말을 늘어놓았다. 음주, 커피, 탄산음료 모두 안된다고 했다. ! 다른 건 몰라도 주말에 맥주 한잔하는 건 일주일의 낙이었는데, 맥주 대신 우유를 마셔야 한다니! 이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완전한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되겠다.

 

깁스하고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 무엇보다 불편한 점은 계단이었다. 오르내리기가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3~4층 정도는 운동 삼아 걸어 다녔는데, 이젠 한 층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한다.

 

해가 점점 길어지고 봄볕의 따뜻함이 어느덧 따가움으로 변하는 5, 이종사촌 형 1주기를 맞아 마장동 이종사촌 누나네서 추도 모임을 하기로 했다. 모임은 저녁 7시지만, 조금 일찍 와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그러겠다고 한 터라 반차를 썼다. 용두역이 생긴 후로 회사에서 마장동까지 지하철을 한 번만 갈아타면 되어서 오가기 쉬워졌다. 버스 노선도 있긴 한데, 상태가 상태다 보니 지금은 그림의 떡이다.

 

오후 한 시 반쯤 용두역에 도착했다. 신설된 지 얼마 안 되었고, 신설동과 성수를 잇는 2호선 지선이라 평일 오후에는 이용객이 많지 않다. 전화 통화를 하는데 목소리가 울렸다. “! ~~~” 동굴에서 말하는 듯한 울림이었다. 이것 봐라? 목발을 짚고 엘리베이터로 천천히 걸어가며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 아아아.” 신이 나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나 혼자 내린 터라 주위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운행한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한참 만에 문이 닫힌다. ‘여기서 밖에 대고 말해도 소리가 울릴까?’ 괜한 호기심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을 향해 말을 하자 우렁우렁 내 목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에 엘리베이터를 타는군.”

 

70년대 영화 속 주인공 목소리처럼 목을 잔뜩 쥐어 짜냈다.

 

숙이! 당신 생각에 나는 오늘도 닫힘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오. 숙이! 당신이 오지 않으니 엘리베이터가 떠나지 않는군. 숙이! , 나의 숙이! , 나의 베아트리체! 당신을 위해 준비한 사랑의 두레박! 지상으로 가는 행복의 특급열차! 언제쯤이면 내 맘을 알아주겠소.”

 

키득대며 최대한 느끼하게 목소리를 뽑아내는데……, 느닷없이 여중생 두 명이 엘리베이터로 쑥 들어왔다! 닫힘 버튼을 미친 듯이 눌렀지만, 문은 요지부동이다. 천년 같은 시간이 흘렀다. 학생들이 내리고도 한참을 엘리베이터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죽은 척했다.

 

용두역 4번 출구. 바로 앞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는데, 왜 얘들은 엘리베이터를 탔을까? , 대체 왜! 몸도 마음도 모두 서글픈 2014년, 5월의 목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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