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하얀 바탕에 벌레가 꿈틀대며 기어가는 문양의 석고보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머리를 휘도는지 정신이 멍했다. ‘여기가 어디더라.’ 고개를 돌려보니 탁자 건너 장의자(長椅子)에 Bob이 누워있다. 흐릿했던 어제 일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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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入隊)한 군인이 기다리는 건, 휴가 그리고 전역, 딱 이 두 가지다. 하루는 쏜살같이 흘렀지만, 일주일, 한 달은 너무 길었다. 군대 온 지 만 년은 된 거 같은데, 전역 날은 보이지도 않았다. 휴가 날짜를 받아 놓으니 시간은 더 안 갔다. 밖에 나가면 시간을 알뜰하게 쓰리라. 위시 리스트를 적어 놓고, 매일 시간표를 짰다. 선임이자 중학교 동창인 포비가 쯧쯧 혀를 찼다. “너 그거 하나도 못 지킨다.”
대망의 휴가 첫날! 신고를 하고 위병소를 나섰다. 각종 훈련이나 대민지원, 종교활동……. 등등의 일로 부대를 나올 때와는 달랐다. 인사과 동기가 건네준 휴가증이 마법을 부린 듯, 몸은 가볍고 길은 푹신했다. 공기마저 냄새가 달랐다. 여기가 바로 사회구나! 이게 얼마 만이냐!!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왔다. Bob을 만나 같이 점심을 먹고 학관 앞에서 헤어졌다. 그는 ‘수업이 두 개 남았는데, 마지막 강의는 출석만 체크하고 나오겠다.’고 했다. 과방으로 향했다. Bob이 수업 듣는 동안 거기서 시간을 보낼 심산이었다. 과방 문을 빼꼼 열었다가 JJ 형에게 걸렸다. “일루와, 일루와. 이 새끼가 이거, 응? 휴가 나왔으면 엉아한테 제깍 연락을 해야지. 스텔스 모드로 염탐을 해?”
“버들골로 가자!”
누군가의 제안에 과방에서 노닥이던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나른한 오후, 햇살마저 잔디 위로 몸을 눕히는 시각, 중간에 사라졌던 동기와 후배가 술과 안주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너를 위해 준비했어!” 그렇게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삼 오 십오, 오 삼 십오, 지화자 좋다~!”
게임 한 번에 술 한 잔, 노래 한 곡에 술 두 잔……,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다 술이 얼근히 올랐다. 수업을 땡땡이친 Bob이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나는 이미 반쯤 맛이 간 상태였다. “아니, 형! 술을 적당히 멕여야지! 애를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요!” JJ 형은 Bob의 항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형은 진작 꽐라가 되어 “오! Bob! 너 빼놓고 먹었다고 그래? 자, 한잔해!” 축축히 젖은 종이컵을 건네며 헤헤 웃을 뿐이었다.
저녁 때는 동아리 사람들과 약속이 있다. 더 있다가는 만취할 거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걸어 학관에 닿았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나무가 가지를 흔들었다. 가로등 빛이 만들어낸 나뭇잎 그림자가 내 앞에서 어른거렸다. ‘어서 와. 오랜만이야.’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인사를 나눴다. ‘잘 지냈어?’
동아리방에는 ‘쑥 자매’만 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와 Bob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배! 언제 나왔어요?”
“이 넝마주이들! 요즘도 동방에서 공부해?”
‘쑥 자매’ 혹은 ‘쑥 시스터즈’로 불리는 이 두 녀석은 다른 동아리나 학과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비품 중에 괜찮다 싶은 물건이 눈에 띄면 동방으로 가져오곤 했다. “이거 필요하지 않아요?”, “있으면 다~아~ 쓴다고요.” 인쇄소 하는 동기 아버님이 재단이 잘못되거나 사용하고 남는 종이가 생기면 매번 가져다주셔서 동아리에 넘쳐 나는 게 백지였는데, 쑥 자매가 이면지를 잔뜩 주워 온 이후 나는 그들을 ‘넝마주이’라 불렀다.
“선배! 이거 드실래요?”
한 녀석이 가방에서 미니어처 양주를 꺼냈다. 화수분처럼 책가방에서 작은 병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Bob의 눈이 빛났다.
“웬 거여?”
“엄마가 버린다고 해서 챙겨왔어요.”
“오! 잘했어!!”
“이래도 제가 넝마주이에요?!”
“아녀. 아녀.”
Bob이 책상 서랍에서 종이컵을 꺼냈다.
“사람들 오기 전에 얼른 먹자.”
필름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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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걱. 동아리방 철문이 열렸다.
“내 이랄 줄 알았다! 안 인나나!”
김여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우, 머리 아파. 쨍한 목소리에 골이 흔들리는 것 같다. 근데 이 시각에 웬일이지? 얘 오늘 오전 수업 없다고 했는데.
“어우, 야.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아퍼.”
“일나라! 지금이 몇 시고!”
오전 여덟 시 오십 분. 휴가 중인 군인에겐 널널한 아침이다.
“짐 다 쌌다! 뭐하노!”
“응? 누구 이사해?”
“기억 안 나나? 오늘 내 이사하는 거 도와준다고 했잖아.”
시체처럼 누워있던 Bob이 부스스 일어났다.
“어제 니가 그랬잖어. 짐 나르는 거 도와준다고. 너한테 맡기래매.”
“내가? 어제?”
기억을 더듬었다. 파편처럼 흩어진 장면 장면이 띄엄띄엄 떠올랐지만, 도무지 순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허공을 보며 잠시 멍해 있는데, Bob이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데미소다 사 왔어?”
“하모! 그레이프로 사 왔지!”
아! 생각났다. ‘Insert coin!’이라고 했었다.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려면 동전을 넣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을 부리려면 응당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했던 것 같다. 세상의 이치 운운하면서.
“그래? 그 대가가 뭔데?”
“데미소다!”
“무슨 맛?”
“포도 맛!”
술 먹은 다음 날은 데미소다를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와야 술이 깬다고 나를 부리려면 데미소다를 사 오라고 큰소리 뻥뻥 쳤었다. “콜!” 김여사의 대답은 시원했다. 내 옆에서 조용히 미니어처 양주를 마시던 Bob이 나와 세트로 묶여 같이 짐을 나르기로 했다. 그야말로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은 셈이다. Bob은 성남에서 통학했는데, 집에 들어가면 못 일어날 것 같다고, 그냥 학교에서 자겠다고 했었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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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이 리어카를 빌려왔다. 홍길동처럼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학교 곳곳을 쏘다니더니 모르는 게 없고 못 하는 일이 없다. 그는 어제 용달차를 부른다는 김여사의 말에, ‘짐도 얼마 안 되고 거리도 가까운데 뭐하러 돈을 쓰냐. 그냥 리어카로 나르자.’고 했었다. ‘어디서 리어카를 구하냐.’는 사람들의 걱정에 ‘다~ 수가 있다.’고 하더니 정말 아침에 우리 앞에 리어카를 현현 시켰다.
김여사는 거실과 주방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셰어하우스에 살았다. 마음에 맞는 과 선후배들과 주택 한 층을 빌렸는데, 살다 보니 이런저런 갈등으로 부딪치고 최근에는 선배가 남자 친구를 자꾸 집으로 데려와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때마침 근처에 여성 전용 고시원이 생겼고 가보니 생각보다 환경이 좋아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다다다 쏟아지는 김여사의 말에 그간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야! 타!”
리어카 손잡이를 슬쩍 들어 꽁무니를 아래로 내렸다.
“뭐?”
“오빠 차 샀다. 너 태우러 왔어.”
“부아앙~ 붕붕! 부아앙~!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터보 엔진이 장착된 슈퍼 리어카의 배기음이여.”
Bob이 철골에 손을 얹으며 거들었다.
“하아! 니네 언제 철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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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김여사의 자취방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던 쑥 자매가 또 우리를 맞았다. 얘네가 왜 여기 있지? 설마 얘네도 Bob처럼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은 건가?
김여사가 공과금과 월세를 정산하는 사이 현관 앞에 쌓아 둔 짐을 아래로 내렸다. 짐이 얼마 없어서 10분도 안 걸렸다.
“자, 가즈아!”
목적지는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한 짧은 거리다. 다만, 언덕이 문제였다.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고시원에 닿을 수 있다. ‘으다다다!’ 오르다 “어어어?”하며 미끄러지기를 여러 번, 짐을 그냥 들고 날라야 하나, 누구를 더 불러야 하나 고민에 빠진 순간, “저희가 도와 드릴까요?”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우리 학교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뒤에서 쭉쭉 밀어주는 힘에 언덕 끝까지 쉽게 올라왔다. “감사합니다.” 배꼽 인사는 이럴 때 하는 거다. “아유~ 뭘요.” 손사래를 치며 청년들이 멀어져갔다.
“체대지?”
“그런가봐. 멋있어.”
쑥 자매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우리를 도와준 청년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리 학교에 체대가 있었냐?”
“글쎄. 체교과 아닐까?”
“선배! 그만 구시렁거리고 얼른얼른 가죠?”
“하아! 이 노인네들. 언덕 하나도 못 오르면서 말은 또 많아요.”
“아니거든! 어제 술 마셔서 그렇거든!”
“맞아! 술만 안 마셨어 봐. 이 정도는 껌이지!”
“선배…!”
우리를 바라보는 쑥 자매의 눈빛은 한심함과 안쓰러움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뒤섞여 있었다.
“핑계로 성공한 건 김건모 밖에 없어요.”
“알아요? 핑계가 통한 건 김건모뿐이죠.”
이런 팩력배들!
“빨 안 오고 머해!”
먼저 고시원으로 출발해서 잔금을 치르고 우리를 기다리던 김여사가 소리를 빽! 질렀다.
갑니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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