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가 내리고 도시가 온갖 색으로 물들면 회사를 나선다. 집에 가는 것 외에 하고 싶은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가끔 약속이 있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퇴근 후의 만남은 다음 날 아침의 피로를 더할 뿐이어서 되도록 휴일로 미루거나, 휴일을 앞둔 저녁을 선호하는 편이다.
“여보셔요.”
- 저녁 먹자! 몇 시에 끝나?
“8시. 좀 늦지 않나? 다음에 하지?”
- 다음에? 왜, 장례식장서 사진 쳐다보며 밥 먹게?
“에효. 알았어. 어디로 갈까?”
- 우리 집으로 와.
마이크가 돌아왔다. 그의 가족이 일본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 몇 가지를 대신 해주었는데, 신세 갚겠다고 날짜를 잡으라 했었다. 쉬는 날은 집에 내려가고 평일엔 퇴근이 늦어 통 시간을 내지 못했다.
- Bob도 불렀어. 와이프랑 같이 온대.
그 녀석이 오면 자리가 커질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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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여?
“지금 차 탔어. 야, 나 집에 들러서 옷만 갈아입고 가면 안 되냐? 10분 거리잖아.”
- 헛소리하지 말고 일루 바로 와. Bob네는 진작에 왔어.
8시 정각. 영상통화도 아닌데 마이크의 단호한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 애들 과자도, 우리 마실 술도 다 있으니까, 마트는 쳐다도 보지 말어.
오랜만에 가는 친구 집, 빈손으로 가기엔 마음도 손도 허전해서 뭐라도 사갈까 했는데, 얘가 못 본 사이에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선수를 쳤다.
- 형! 어디예요?
K다.
“어. 나 퇴근해서 막 나왔어.”
- 저는 거의 다 왔어요. 같이 들어갈까요?
“네비 보니까 곳곳이 정체라 시간 걸릴 것 같은데, 먼저 들어가지?”
- 아…. Bob 형 좀 불편한데…. 형수도 온다면서요.
“뭐여. 우리 K한테 불편한 사람이 있었어?”
- 그럼요! 제가 뭐 멍멍인가? 사람만 보면 헥헥대며 좋아하게?
“다들 그러던데? 만약, 전생이 있다면, 너는 시베리안 허스키였을 거라고.”
- 아, 형!! 아니라고오! 내가 얼마나 의심이 많은 놈인데!
“에효.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런 놈이 처음 만난 사람의 말을 믿고 주식에 거액의 돈을 태워?’라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왔으나, 참았다.
주차하고 10분 정도 걸어 마이크 집에 다다랐다.
현관문이 열리자, 고음의 깔깔대는 웃음과 질펀한 술자리의 냄새가 나를 덮쳤다.
“어서 와.”
멈칫! 걸음을 멈춘 나를 마이크가 잡아끌었고, K가 뒤에서 밀었다.
“형! 들으가, 들으가.”
“지금 시작된 분위기가 아닌데? 잔치하냐?”
“정답! Party time!”
마이크가 씨익 웃었다.
--- ** --- ** ---
“한잔해.”
불콰해진 얼굴로 Bob이 술병을 들었다.
“애는 어쩌고.”
“장인어른하고 장모님 온천 가는 데 따라갔어.”
“엄마하고 떨어질라구 해?”
“아주 지 외할머니 껌딱지여. 아까 통화했는데, 할머니랑 인형 놀이 하셔야 한다고 얼른 끊으래더라.”
친구들을 만나면, 그게 얼마만의 만남이든 마음도 모습도 예전 그대로인 것 같은데, 화제(話題)는 우리가 나이를 먹었음을 실감케 한다.
“형! 일본 가서 오래 있었으니까, 일본어 좀 하겠네요?”
“그으럼!”
“하나만 해주세요.”
“이찌! 니! 산! 시!”
“오!!!!”
아니다. 화제고 뭐고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나면 여전히 시시껄렁한 농담을 내뱉고 낄낄대며 논다. 철은…, 에효…, F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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