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에 갈 겨?”
이른 아침, 친구는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시간을 물었다.
지난번의 만남 이후, 주말에 시간이 맞으면 친구와 산정(山頂)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등산객이 뜸한 산이고, 친구의 아지트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더욱 드물어, 호젓하게 앉아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막걸리 마시기 좋다.
“한…, 열 시쯤 출발할라구. 급한 거 없으니까 천천히 와.”
식자재 마트에서 육포 하나, 막걸리 한 병을 사서 산에 올랐다. 경사가 완만하고 평탄해서 오르기 쉬운 등산로가 있지만, 정상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탓에 늘 가파르고 좁은 길을 택한다.
“어? 언제 온 겨?”
“어여와.”
“오빠. 일루 와서 앉어. 바람 시원하니 좋네.”
여태껏 내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렸는데, 오늘은 친구가 먼저 와 있었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라 자신의 아내까지 대동했다. 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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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뻥까한테 아가씨 소개해 준다고 했냐?”
뻥까. 중학교 동창의 별명이다. 얼마전, 그는 내게 “주변에 참한 아가씨 있으면 소개 좀 해줘.”라고 부탁을 했다. “내 주변엔 아가씨는 없고 다들 아줌마여.” 그랬더니 “괜찮어. 서울 사람이면 돼.” 다 필요 없고, 서울 사람이면 족하다며 신신당부했다. 이런 캐릭터가 아닌데 이상하다 싶어 일단 알았다고 했다. “당장 어떻게 소개해 줄 사람은 없어. 알아보고 이야기 꺼내 볼게.” 내 대답에 뻥까는 무척 기뻐했다. “고마워. 역시 너배끼 읎다.”
“그런 겨?”
“어. 알아본다고 했지.”
“공무원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매. 20대 아가씨로.”
“뭐?”
“오빠. 동네에 소문이 파다혀. 오빠가 자기만 믿으라고 했다매. 젊고, 이쁘고, 대학 나오고, 참한 공무원 아가씨 소개시켜 준다고 했댜.”
“걔는 요즘도 그러고 사냐? 아니 왜 뻥을 끊지를 못혀. 약쟁이여?”
친구들과 지인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던 몇 번의 선이 실패로 돌아간 후, 뻥까는 곰곰이 원인을 분석했다. ‘내 매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못해서 그랴.’ 동네 꼬마들에게 갑바 아저씨로 불릴 정도로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그는 자신의 마초적 기질과 상남자다운 모습을 과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간 선.
아침저녁 일교차가 꽤 크던 5월의 어느 날. 나시 티 한 장 덜렁 걸치고 반바지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간 그는 10분 늦은 아가씨가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하하하”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호탕한 웃음을 짓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려……, 침을 뱉었다.
“크~으응~ 카~아악! 퉷!”
아뿔싸! 마스크를 벗는 것을 깜빡했다!!
하지만, 상남자가 이에 아랑곳할쏘냐!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다시 한번 침을 뱉었다. 보다 가열차게! 마스크를 쓴 채로!!
“크으~~으~응~ 카아~~아아악~ 퉷!!!”
만남은 그날로 종결.
홀로 남겨진 뻥까는 고뇌에 휩싸였다. ‘왜 모르지? 대체 왜 내 매력을 알지 못하는 거지?’ 순간 주변에서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여. 계산한 겨?” 아르키메데스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광명의 빛이 뻥까를 스쳐 갔다. ‘맞어! 다덜 촌년이라 그려! 서울 여자를 만나야 혀!’ 휴대폰을 꺼냈다.
“찬샘아! 니 주변에 참한 아가씨 없냐?”
--- ** --- ** ---
“아오! 또라이 새끼! 내가 그때 걔한테 얼마나 미안했는지 알어?”
친구의 아내, 내 동생의 친구, 어릴 때 같이 놀던 녀석이 분노를 토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짜장면 먹으러 가자구 하구선, 거서 담배 피다가 쫓겨 났댜. 이게 사람이여?”
“식당에서 담배를 폈다고?”
“그려. 사나이는 그런 거 가리믄 안 된다고 막무가내였댜.”
아…! 뻥까에게 여자 소개해 주는 것은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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