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사무소에서 나오는데 비가 쏟아졌다. 예보에 없던 갑작스러운 소나기라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로비로 돌아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잠긴 찰나 전화가 왔다. 아버지다.
“너 어디여?”
“읍사무소요.”
“벌써 간 겨?”
“바로 왔어요. 차가 안 밀려서 금방 왔거든요.”
“지달려. 글루 델러 갈게.”
출입문 옆에서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는데, 뒤에서 누가 아는 척을 했다.
“찬샘이 아녀?”
“어? 영규야.”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영규다.
“여긴 어쩐 일이여?”
“할머니 산소 파묘 때문에 서류 작성할 게 있어서 왔지. 너는?”
“어린이집 행사가 있어서. 여서 한다네.”
20년 만의 만남. 학교 다닐 때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껄끄러웠다. 친하게 지내다 사이가 틀어지고 앙앙거리다 시간이 흐르며 데면데면해졌다. 졸업하고는 만나지 못하다 20년 전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연락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와서 깜짝 놀랐다. 그때 정신이 없어서 잘 챙기질 못했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아주 내려온 겨?”
“아녀. 반차 쓰고 왔어. 너는 뭐 혀?”
“나는 아부지 사업 물려받아서 하고 있잖어. 맨날 삽질하고 쎄멘 가루 먹고.”
매력적인 눈웃음은 여전했다.
“맞다. 봉투 잘 받았어. 어떻게 알고 돈을 보냈어.”
작년, 영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중학교 동창을 통해 부의금을 보냈다.
“미안하다. 가보지도 못하고. 너는 우리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왔잖어. 그때 잘 챙기지도 못하고 그냥 보낸 게 내내 마음에 걸리더라.”
“뭔 소리여. 누가 지 안 챙겼다고 뭐라고 하디? 그런 걸 바라는 놈이 미친놈이지. 그리구 잊지 않고 봉투라도 보낸 게 어디냐. 나는 니 이름 보는 데 반갑기만 하더만.”
아버지의 차가 읍사무소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먼저 갈게. 나중에 술 한잔하자.”
“그려. 내려오면 연락혀. 너 전화번호 이거 맞지?”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는데, 내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었다.
“어. 맞어. 담에 연락할게.”
돌아서는 순간, 오래전 녀석이 내게 보낸 이런저런 화해의 제스쳐가 떠올랐다.
그걸 알면서도 외면했던 그때의 옹졸한 내가 한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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