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규모를 최대한 줄였기에 초대받은 사람이 양가(兩家) 합쳐 채 스무 명이 되지 않았는데, 그중에 나와 마이크가 있었다. 유이(唯二)하게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예식 30분 전에 도착했는데, 다들 안면이 있는지 서로 인사하고 상대를 소개하는 와중에 나를 두고 ‘누군지 아냐.’고 소곤대는 소리가 귀에 들려와 마이크가 도착하기 전까지 꽤 뻘쭘했다.
결혼식은 멋있었다. 아름다운 신혼부부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화창한 날씨였고, 미세먼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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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K가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집들이 겸, 결혼식 참석에 대한 감사 인사 겸, 아내 자랑 겸……, 겸사겸사 열게 된 조금 늦은 피로연이었다. 술은 넉넉했고 해는 길었으며 이야깃거리는 넘쳐서 웃음과 야유, 그리고 타깃이 된 자의 억울함이 가득 담긴 항변이 공간을 빈틈없이 메웠다.
“근데 오빠들은 우리 오빠를 대체 어떻게 만난 거예요?”
“응? K가 얘기 안 해요?”
“네. 맨날 ‘뭐 어쩌다 보니 만나게 됐지.’ 이래요.”
목을 쥐어짜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새색시의 깜찍함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고향도 다르고, 학교도 다르고, 게다가 오빠들은 학교 다닐 때 운동도 안 했다면서요?”
맞다. 우리와 K 사이에는 접점이 없었다. 그날 녀석이 우리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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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쯤 전의 일이다.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마이크가 방학을 맞아 귀국했다. 당시 마이크는 결혼 문제로 부모님과 냉전 중이었는데(사귀던 아가씨를 부모님이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 우리집에 며칠 머물며 부모님을 설득할 전략을 짜기로 했다.
마이크의 입국 날, 갑작스레 지방 출장이 잡혔다. 그의 도착시간에 도저히 맞출 수 없어 문을 잠그지 않고 출장을 떠났고, 문자와 메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문을 열어 두었으니 혹 연락이 안 되더라도 집에 들어가서 쉬고 있어.’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새벽 네 시 이십팔 분. 피곤하니 숙소를 잡아 자고 올라가자는 상사를 설득해 집까지 데려다주고, 우리집 현관문을 연 시각.
“야. 비빔면이랑 짜파게티랑 반씩 섞었더니 희한한 맛이 난다? 이렇게 해 봤어?”
정량적이며 창조적인 요리를 추구하는 마이크가 해맑은 미소로 나를 맞았다.
“근데 저 방에서 자는 애는 누구냐?”
“응?”
방문을 열었더니 곰 같은 체구의 남자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다.
“네가 데려왔어?”
“아니. 집에 오니까 자고 있던데?”
몸을 흔들어 자고 있던 남자를 깨웠다.
“아저씨! 아저씨! 일어나요.”
부스스 일어난 남자가 우리를 보고 흠칫! 놀랐다.
“누구세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여기요?”
눈을 비비며 ‘하아~’ 한숨을 내 쉬고 방을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연방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술에 취해서 집을 잘못 찾아왔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집이 어디예요?”
“자양동이요.”
“여기는 답십리예요. 갈 수 있겠어요?”
“네. 죄송합니다.”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며칠 후, 저녁으로 알탕을 하려고 퇴근길에 마이크를 만나 장을 봐서 들어갔는데, 내 침대 위에 며칠 전 그 남자가 누워 있었다. 이 새끼, 뭐지?
“너 문 안 잠그고 나왔냐?”
“응. 너도 시장 갈 때 맨날 안 잠그잖아.”
“하아! 내가 너한테 열쇠를 왜 줬겠어. 독일에선 문을 열어 놓고 다녀?”
“아니!! 그럼 큰일 나지!”
자는 남자를 깨웠다.
“왜 또 여기서 자고 있어요?”
“어?”
남자는 또다시 “죄송하다.”며
연방 고개 숙여 인사하고 부리나케 떠났다.
다음날, 현관 보조키를 도어락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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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집 청소를 하고 빨래를 널고 옥탑 난간에 기대서 맥주를 마시며 한가롭게 동네를 내려다보는데, “저기요.”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과일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다. “누구시죠?” 처음엔 누군지 못 알아봤다.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깬 흐리멍덩한 모습만 보다가, 말끔한 모습으로 찾아왔으니 누군지 모를 수밖에.
“저…, 얼마 전에 술 마시고 두 번이나 형님께 신세 졌던 사람입니다. 사과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K와의 세 번째, 밝은 날에는 첫 번째 만남이었다.
“맥주 마실래요?”
"네!"
해맑은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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