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 늦봄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집에 무슨 일 있나?’ 할머니가 파킨슨병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가족이 염려하던 시절이어서 걱정부터 들었다. 토요일 과외를 일요일로 미루고 금요일 밤, 집에 내려갔다.

“담주 수요일이 우리 아덜 생일이잖어. 멱국은 멕여야 할 거 아녀.”

다행이다. 별일 아니다. 늦은 저녁을 먹었다.

“외숙모한테 전화 좀 혀.”
“외숙모요? 왜요?”
“수민이가 속 썩이나 벼.”
“걔가요?”

수민이는 개성이 뚜렷하고 고집이 센 제 형, 누나에 비해 기질이 유순하고 공부를 곧잘 해서 외가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 녀석이 느닷없이 ‘운동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몸이 약한 게 늘 걱정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 도장에 다니게 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자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고 싶다고 떼를 써서 어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 했다.

“알았어요. 내일 전화하면 되죠? 오늘은 늦었잖아요.”
“아녀. 지금 혀. 느 외숙모 안자고 지다릴 겨.”

외삼촌 댁에 전화를 걸었다.

“찬새마. 우째 하머 좋나…….”

외숙모의 하소연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니가 좀 잘 달개봐라.”
“네. 다음 주 토요일에 제가 함 찾아뵐게요.”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과외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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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주말이면 인천에 갔다. 토요일, 잠실에서 과외를 끝내고 곧바로 지하철을 탔다. 외삼촌 집은 계산동의 오래된 아파트여서 부평역에서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두 시간 정도 걸렸다.

도착 시각은 밤 아홉 시 무렵.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바로 수민이를 앞에 앉혔다. “밥 묵고 하라고!!” 그럴 때마다 외숙모가 소리를 질렀지만, “먹고 왔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영혼 없는 대답으로 그 말을 뭉개고 숙제 검사를 했다. 마음이 급했다. 그렇게 토요일 밤과 일요일 오전을 보내고, 집에 간다고 인사를 드리면 외삼촌이 3만 원, 외숙모가 5만 원, 외할머니가 2만 원…, 어른들이 내 주머니에 돈을 찔러 넣었다. “어? 자꾸 이럼 저 담 주부터 안 와요?!”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이제 내 가방에 몰래몰래 돈을 넣어서 골치가 아팠다.

유재가 다니는 학교가 외가와 가까웠다. 그때 유재는 주안에 있는 고모네 집에서 통학했는데, 일요일이면 학교에 와서 나를 기다렸다. 일요일 오후는 유재와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술 한잔하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신록의 계절을 지나 여름으로 접어든 어느 주말이었다. 오늘은 부평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덮쳤다. '침엽수처럼 촘촘한 햇빛을 손 그늘로 가리며'[각주:1] 인파를 헤치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찬샘아!” 유재가 그의 과 선배와 지하상가 출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재는 동아리 선배를 짝사랑했다. ‘술 한잔 사주면 네 연애를 팍팍 밀어주겠다.’는 과 선배의 말에 “어떡하지?” 내게 조언을 구했고 ‘그럼 오늘 같이 만나자.’고 했던 참이었다.

여름날 오후 세 시, 밥을 먹기도 술을 먹기도 애매했다. “지하상가 구경이나 할래?” 매주 오가는 길이어서 특별할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수였다. 쇼핑하는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이렇게 힘들지 몰랐다. 유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토요명화에서 봤던 ‘빠삐용’의 그것과 흡사했다. 내 눈빛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이곳은 지하 던전이자 개미지옥, 어서 탈출해야 한다. 우리는 유재의 선배가 물건을 들고 ‘어떠냐.’고 물을 때마다 칭찬을 퍼부었다. 소싯적 읽었던 ‘디즈니 명작동화’에 나온 찬사까지 끄집어낸 필사의 노력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유재와 나는 일곱 살 꼬마의 종이 인형처럼 제멋대로 구겨지고 흐물흐물해진 상태였다. “저녁 뭐 먹을까?”, “고기요!” 단백질! 단백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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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술자리가 그렇듯, 오늘도 하나의 화제가 진득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짝사랑 그녀에게 마음을 전할 성공적인 고백은 어떤 것인가.’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책과 영화로 가지를 뻗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좋아한 유재는 편지를 쓰고 싶다고 했다. 아홉 살의 쓰라렸던 고백이 떠올랐다.

“난 반대여!”

유재의 선배가 가방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꺼냈다.

“니네 접속 봤어?”
“전 봤죠.”
“저는 못 봤어요. 무슨 내용이에요?”

줄거리부터 음악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선배는 쉼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가히 ‘영화대 영화’의 전창걸에 비견할 만한 입담이었다. 넋 놓고 이야기를 듣다 시계를 보고 아차 싶었다. 자칫하면 막차를 놓칠 뻔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맞다! 아까 접속에 나왔다는 그 노래 제목이 뭐였죠?”
“어떤 거? A lover’s concerto?”
“아뇨. 그거 말고요. 등장인물 사이에 매개체가 된 음악이요.”
“아, 그거? 벨벳 언더그라운드, Pale blue eyes.”

지하상가 음반매장에서 접속 O.S.T를 샀다. 음악을 들으며 가다 보면 집까지는 금방일 것이다.

눈을 떴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객차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한 곳을 보며 웅성댔다. 노약자석 앞에 내 또래의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바지를 내려 하얀 엉덩이를 드러낸 채로! 이상한 냄새가 확 풍겼다. “으악!”, “어머!” 경악성이 터졌다. 아버지뻘의 아저씨가 그에게 다가가 호통을 쳤다.

“학생! 지금 뭐 하는 거야!”
“죄…, 죄송…해……요. 흐…윽! 금방… 끝… 흑! 낼게요…….”

창밖에서 보름달이 건물 사이로 숨바꼭질했다.
반복해서 들었던 ‘Pale blue eyes’의 한 소절이 귓가에 떠다녔다.

“Linger on, your pale blue eyes.”

  1. 채호기, ‘너의 등’, 『밤의 공중전화』, 문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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