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글을 뒤적이다 보면, 잊었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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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왔다. 낙엽 지는 가을에 떠났는데, 공항을 나서자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겨울이었다. 회사에 들러 인사만 하고 나왔다. “고생했어. 주말에 푹 쉬고 월요일에 보자고.” 회사도 사람들도 여전했다. 분식집에서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이 맛이다. 이 빨갛고 얼큰한 국물이 그리웠다. 비로소 실감이 들었다. 돌아왔다. 출장은 끝났다.

 

집 앞 슈퍼에서 소주를 샀다. 하늘하늘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소주 좋아~ 소주 좋아~ 소주 주세요~” 소주송이 절로 나온다. “찬샘아!” 여자친구다. “? 어쩐 일이야?” 여자친구는 오늘 일이 늦게 끝난다고 했었다. 아쉽지만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집 앞으로 찾아오다니! 역시 서울이 좋구만.

 

잠깐 시간 있어?”

그럼! 내가 돈이 없지, 시간이 없겠니?”

 

여자친구는 잠깐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곧 라면박스를 들고 왔다.

 

받아.”

이게 뭐야?”

일단 받아.”

 

바람을 타고 춤추던 눈발이 상자 위로 내려앉았다.

 

우리 헤어지자.”

?”

헤어지자고. 갈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서른…, 나이에 자 붙이고 맞이하는 첫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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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웠다. ‘전조(前兆)가 있었나?’ 매일은 아니지만 종종 만났다. 유머 코드가 비슷해서 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댔고 다툼도 거의 없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헝클어졌다. 안 되겠다. 씻고 일단 자자. 맑은 정신이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감이 오겠지.

 

? 물이 안 나온다. 단수되었나? 아래층 건물주 할아버지네 문을 두드렸다.

 

물이 안 나온다고? 우린 잘 나와!”

 

건물주 할아버지는 날 추우면 수도 얼지 않도록 물을 틀어 놓으라.’고 이야길 했는데, 왜 안 했냐며 타박을 놓았다. 분명 장기간 출장 가게 되었다고, 겨울에나 돌아올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는 못 들었다고 방방 뛴다. 아이고, 갈수록 태산이다.

 

설비업자를 불러 보일러실 배수관을 스팀 해동기로 녹여봤는데, 언 지점이 여기가 아닌지 별무소용이다. “오늘만 참아봐. 내가 내일 다른 사람 불러서 고쳐 놓을게.” 내일을 기약하며 건물주 할아버지는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머리가 멍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쉬는데 부산에 있는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해?”

그냥 멍하니 있어요. 수도가 얼어서 물이 안 나오거든요.”

서울이가? 니 들어왔나? 은제?”

. 오늘 막 왔어요.”

내려와라. 여기는 따신 물 콸콸 나온다. 마침 할 말도 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부산 가는 버스를 탔다. 잠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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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다. 밥은?”

먹었어요.”

 

선배는 나를 돼지국밥집으로 데려갔다.

 

. 나 밥 먹었는데…….”

먹긴 뭘 먹노. 또 달구셰끼 오줌마이 깨작댔겠지. 니 부산 처음이제? 이까지 와서 이거 안 무우면 후회한다.”

 

돼지국밥에선 누린내가 났다. 순대 한 점에 소주 한 잔, 그리고 쏟아지는 이야기. 한참을 떠들던 선배가 내 앞의 국밥을 흘끔 보더니, 혀를 찼다.

 

그게 뭐꼬. 아지매! 이것 쫌 데파 주이소.”

 

다시 김이 펄펄 나는 돼지국밥이 내 앞에 놓였다. 선배가 부추를 가득 집어 내 뚝배기에 넣더니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부었다.

 

정구지를 듬뿍 느야지. 이래 먹어야 맛있다.”

 

이튿날, 토요일에도 쉬지 못하는 선배는 일찌감치 출근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거실을 뒹굴며 만화책을 보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터미널에서 표를 끊고 친구에게 연락했었다. 그는 선약이 있다고 내일 만나자.’고 했다.

 

어데고?”

맹구 형네 집이야.”

아라따. 거 있어라. 곧 데리러 갈게.”

 

친구와의 약속은 점심이었다. 지금은 오전 930. 이 녀석은 대체 점심을 몇 시에 먹는 거지? 부랴부랴 씻었다. 한가로운 오전은 물 건너갔다.

 

해장했나?”

. 커피 마셨어.”

내 그랄 줄 알았다. 그기 무슨 해장이고!”

 

그는 나를 돼지국밥집으로 데려갔다. 어제 돼지국밥을 먹었다고, 나와 맞지 않아서 얼마 먹지 못했다고 했는데도, “이기 진짜다. 그 행님은 맛을 잘 몰라.” 친구는 큰소리를 탕탕 쳤다.

 

어매요! 여기 국밥 두 개 주이소.”

 

김이 펄펄 나는 돼지국밥이 내 앞에 놓였다. 어제처럼 누린내가 났다. 역시 돼지국밥은 나와 맞지 않는다. 자갈치 시장에 갔다. 장 구경은 언제 해도 재미있다. 오후 두 시쯤 일찍 퇴근한 선배가 합류했다.

 

, 묵었나?”

. 돼지국밥 먹었어요.”

아이고. 얼마 묵지도 몬했겠네. 이 노마가 가는 데가 다 글타.”

행님! 그게 행님이 할 소립니까. 맛집은 제가 많이 알지예. 말 들어보니까, 어제 데려간 데서 얼마 먹지도 못했다 카던데.”

으데! 시간이 늦어서 단골집이 문을 닫았다 아이가.”

저도 시간이 일러 단골집이 아직 문을 안 열었다 안 합니까.”

 

자기들끼리 막 싸우다가 정말 맛있는 데라며 나를 데려간 곳은 또 돼지국밥집.

나는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판에 삼겹살 올리고 지글지글 익어가면 김치도 척 올려 그 기름에 볶고 소주 한잔 마시고 싶다고! 내 의견은 묵살되었다. 오늘 저녁은 광복동에서 돼지국밥, 내일 아침은 남포동에서 돼지국밥. 세상에 이런 막무가내 식단이 어디 있어! 짧은 부산 여행, 편의점 삼각김밥이 가장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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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서울로 돌아왔다. 1층 우편함에 소인도 찍히지 않은 편지가 꽂혀 있었다. 이제 호칭에 전()을 붙여야 하는 여자친구에게서 온 편지였다.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싱크대 수도에서 물이 졸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리비가 30만 원 나왔어. 자네가 10만 원만 부담하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아래층 건물주 할아버지는 큰 선심 쓴다는 듯 허허웃으며,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 다 이렇게 사회 경험하는 거지.” 사람 염장을 질렀다.

 

곧바로 계좌이체 했다. 그리고 천천히 샤워를 했다. 대강 머리를 말리고 편지를 뜯었다. 낯익은 필체가 반가웠다. 자기가 왜 헤어질 결심을 했는지, 그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런 사연이 짧고 담백한 문장에 담겨있었다.

 

냉장고를 열어 금요일에 넣어둔 소주를 꺼냈다. 컵에 콸콸 따라 조금씩 마시며 편지를 몇 번이고 읽었다.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아팠다.

 

힘내서, 언제나 행복하게 살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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