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농촌이다. 여느 농촌이 그렇듯 농사일은 끝이 없고 일손은 부족한 흔한 시골이었다. 촌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저마다 몫을 하며 집안일을 거들기 마련인데, 내가 맡은 몫은 염소였다. 우리집은 흑염소를 길렀다. 아침이면 염소를 하천 옆 넓은 초지로 끌고 가 매 놓고, 저녁이면 염소를 몰고 와 우리에 넣었다. 물을 주고 약간의 사료를 통에 부어 주면 그날의 할 일은 끝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수가 많아지면 그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나온다. 우리집 염소의 우두머리, ‘삐딱이는 전생에 닭이었는지 날이 밝을 무렵이면 매에~” 우렁찬 목소리로 울었다. 자기를 우리에서 꺼내 줄 때까지 쉬지 않고, 끊임없이, 미친 듯이! 늦잠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어쩌다 늦어지면 어김없이 심술을 부렸다. 저녁때 데리러 가면 그대로 풀밭에 주저앉아 꼼짝을 안 했다. 그때마다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뽕잎을 잔뜩 따다 바쳐야 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5, 집 곳곳으로 울리는 삐딱이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540. 계절이 여름으로 다가갈수록 아침은 이르게 찾아온다. 기상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풀이 많은 곳에 염소 말뚝을 박고 돌아섰다. 슬리퍼를 신어서 그런가, 이슬에 발이 다 젖었다. 둑방을 오르다 미끄러졌다. “매에~” 삐딱이가 재미있다고 웃어댔다. 그 소리를 들으며 결심했다.

 

절대 농사는 짓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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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산골에서 점방을 하시는 이모가 군(郡)에서 임대한 작은 농지가 있다. 틈틈이 농사를 지어 객지에 있는 자식들에게 고추며 호박이며 감자며 보내시는데, 얼마 전 어머니께 전화해서 네가 이거 부칠래?” 물어보셨다고 한다. 뇌출혈로 수술을 받으신 이후 부쩍 기력이 달리신다고 했다. “나도 같이할 테니까, 농사지어서 반반 노나 갖자.” 이모는 당신이 먹을 양식보다 객지에 있는 자식에게 농산물을 보내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 어머니의 대답이 “Yes”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모네 밭에 고구마를 심겠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걱정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왔다. 어머니는 십여 년 전부터 자가면역 질환으로 고생하고 계시는데, 요즘 체력이 예전과 같지 않아서 걱정하던 터였다. 집 앞 텃밭을 가꾸는 것도 힘에 부쳐 하시면서 누가 누구를 걱정해서 이렇게 일을 만드시는지, 한숨이 나왔다.

 

주중에 시간을 냈다. 부모님과 이모, 세 분께 맡겨 놓기에는 불안했다. 동네 사람한테 부탁해서 로터리를 치고 비닐도 다 씌웠다고 하는데, 어떨지는 가보야 안다. 아침 일찍 출발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서늘했다. 밭일하기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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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님께 인사드리고 곧장 밭으로 갔다. 흙이 부드럽고 자갈이 많지 않은 땅이다. 고랑도 적당한 크기다. ‘생각보다 쉽겠는데?’ 어머니가 고구마 순을 이랑에 푹 찔러 넣으면, 내가 물을 주고 고구마 순 주변을 꾹꾹 눌러주었다. 점방에 손님이 없으면 이모도 밭으로 나와 북삽을 들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의 걱정 가득한 핀잔이 터졌다. “아이고, 언니! 허리 아퍼! 찬새미랑 둘이 해도 금방이여. 얼른 들어가!”

 

심다 보니 고구마 순이 부족했다. 아버지가 이모를 모시고 읍내로 나가서 한 단을 더 사 왔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심으면 될 것 같은데,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땅이 노는 걸 보지 못한다.

 

마지막 고구마 순에 흙을 북돋고 정리까지 끝냈을 때는 오후 두 시쯤이었다. 다 같이 둘러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맞다. 우리 찬새미 옛날에 절대루 농사 안 짓겠다고 허지 않았어?”

아이구, 이모! 그 다짐 진작에 깨졌죠. 어떤 분이 아파트 살면서도 땅 일궈서 무 심고 파 심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래요.”

 

“띠리링.” 점방 출입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이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으러 나갔다.

 

뭐 좋은 일 있슈?”

?”

왜케 빙글거려유.”

. 막냇동생네 왔어.”

 

! !

심심산골의 평일 오후. 까치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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