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날리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기상캐스터는 연일 한파 예보를 쏟아냈지만, 뻥까의 마음은 온통 봄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연애의 계절이 찾아왔다.

--- ** --- ** ---



뻥까는 조심스러웠다. 자칫 내가 뱉은 말이 동티가 될까 말을 삼갔다. 첫 연애였다.

“그게 말여, 나는 말도 안 꺼냈는디, 어뜨케 다들 아는겨.”

한두 다리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좁은 동네다. 게다가 보디빌더를 방불케 하는 우람한 근육과 박박 민 머리, 사시사철 나시티를 입고 다니는 뻥까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여서 몰래 연애는 거의 불가능하다. “너 연애 혀?” 그는 친구들과 지인들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애매한 웃음으로 답했다. 짧은 물음에도 장황한 대답을 하는 그가 말을 못 하고 웃기만 하자 다들 ‘이 녀석 연애하는구먼.’ 대번에 눈치챘다고 한다.

친구들이 비밀의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함 비줘.’ 보챘지만, 뻥까는 아가씨를 꼭꼭 숨겨두고 보여주지 않았다. 만난 지 100일이 지나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될 때 소개하려고 했다. “왜? 쑥하고 마늘도 먹지?” 내 말에 그는 멋쩍은 듯 “흐읍!” 코를 훔쳤다.

“찬새마. 너 이번 달에 시간 언제 되냐?”
“왜?”
“우리 아가씨랑 함 보게.”

토요일 오전에 만나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 ** --- ** ---



날이 화창한 오전이었다. 약속 장소는 청주대학교 앞. “한잔해야지. 차 갖구 오지 말어.” 뻥까의 당부에 버스를 탔다. 북부 정류소에서 내려 길을 건넜다. 나시티를 입은 우람한 근육의 아저씨가 손을 흔들었다. “찬새마! 여기여!”

“하마[각주:1] 온 겨?”
“뭐얼. 때 되니께 왔지! 오느라 고생혔어.”

그늘에 숨어 간간이 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뻥까의 피앙세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흘렀다. 약속 시각은 11시. 시계는 점점 정오에 가까워지는데, 그의 피앙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연락도 안 된다. ‘무슨 일 있나?’ 자칫 말이 씨가 될까, 걱정스런 생각을 입 밖으로 뱉지 못하고 “꽃단장하느라 늦나벼.”, “원래 오늘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극적으로 등장하는 벱이여.” 시시껄렁한 말을 주고받으며 불안함을 삭였다.

‘오늘 만나지 못하겠다.’는 연락이 온 것은 정오가 훌쩍 지나서였다. 어제 쌍커풀 수술 상담받으러 갔다가 ‘오늘까지 할인’이라는 말에 혹해 수술했다고 한다. 매몰법이라 눈이 붓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했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니 팅팅 부어서 조금 전까지 얼음찜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고. ‘이런 꼴로는 도저히 나가지 못하겠다. 미안하다’고 연락이 왔다. 당황한 뻥까는 속사포 같은 말을 쏟아내며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썼지만, 그의 피앙세는 단호했다. 박박 민 뻥까의 머리에서 땀이 샘솟았다. 온천이 터진 듯했다.

“찬새마. 어떡하지? 오늘 도저히 못 나오겠댜.”
“그려? 그럼 다음에 보지 뭐.”
“그냥 우리 둘이서 맥주나 한잔허자.”
“됐다 그랴. 여서 어물쩡대지[각주:2]말구, 얼른 여자친구한테 가봐.”

친구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참을 미안해하다 몸을 돌렸다. 이럴 때 대처를 잘해야 점수를 따는 겨! 심내라, 뻥까!!

--- ** --- ** ---



“어디여?”

뻥까에게서 전화가 왔다. 늦은 저녁을 먹고 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르는 마당의 화초를 둘러보던 차였다. 5월의 포근한 봄바람이 휙휙 마당을 지날 때마다 살랑살랑 화분의 화초들이 몸을 흔들었다.

“집이지 어디여. 아까 내려왔어.”
“내일 시간 괜찮어? 접때 우리 아가씨가 약속 파투 내서 미안하다고 맛있는 거 해준댜.”
“음식을 한다고?”
“어. 뭐 먹구 싶은 거 있냐?”
“다 잘먹으니께 걱정하지 말어.”
“그럼 한…, 12시쯤에 우리집으로 올래?”
“그려 알었어.”

다음날, 하나로 마트에서 와인 한 병을 사서 뻥까가 사는 연립주택을 찾아갔다. 현관문을 열자 기름 냄새가 확 풍겼다. 거실에 펼쳐 놓은 큰 상에는 음식이 하나 가득이었다. 수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엔 죄송했어요. 연락도 안 드리고……. 죄송합니다.”
“아유…, 괜찮어유.”

그럴 수 있다. 우리는 타인과 그리고 자신과 무수한 약속을 하지만, 모든 약속을 철석같이 지키지는 못한다. 상황은 변하고 변수는 늘 있으며 돌발상황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터진다. 나는 그때 친구의 여친이 연락이 안 되는 이유가 늦잠을 잤거나 하는 시시한 까닭이기를 바랐다. 사고가 터진 것보다 백만 배는 낫다. 그리고 오랫동안 갈구했던 연애를 시작한 친구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뻥까의 피앙세는 깔끔하고 담백한 사과의 말처럼 맑은 사람이었다. 잘 웃었고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었다. 친구가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저기…, 근데 찬새마.”
“응?”
“우리 결혼 하믄 말여…, 사회는…, 니가 봐주는 거지?”
“어? 내가?”

에효….

--- ** --- ** ---



비가 내리고 바람에 꽃이 졌다. 기상캐스터는 이제 곧 여름이 온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뻥까의 마음은 온통 봄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연애의 계절이 찾아왔다.

  1. * 하마 : ‘벌써’의 충청도 방언 [본문으로]
  2. * 어물쩡대다 : ‘어물쩍대다’의 충청도 방언. [본문으로]

'섞일雜 글월文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떠버리와 샘쟁이  (0) 2021.06.09
당신은 꽃  (4) 2021.05.29
농군의 마음  (0) 2021.05.07
가을, 수락산  (2) 2021.04.30
이상하다 싶었다  (0) 2021.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