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득이를 처음 만난 건, 봄비 내리던 3월 중순이었다. 그때 우리는 대학 새내기였다. 그는 자신을 노마드[각주:1] 불러 달라고 했다. 비가 내려 쌀쌀하긴 했지만, 학교 여기저기 봄꽃이 피는 시절인데, 그는 떡볶이 코트를 입고 털모자를 쓰고 옆구리엔 소설 책, 『백경』을 끼고 있었다. 사춘기 소년의 냄새가 났다. 아마도 『백경』의 첫 문장을 따라 하는 듯했다.[각주:2]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농담 코드가 비슷해서 만나면 시시껄렁한 말을 주고받으며 낄낄댔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기들은 그를 이라 불렀고, 몇몇 선배는 그의 이름 뒤에 학형이라는 말을 꼭 붙였다.

 

만득아. 왜 애들이 너보고 형이래?”

너 몰랐어? 나 삼수했어.”

삼수? 네가?”

. 그래서 내가 노마드라고 불러 달라고 했잖아.”

. 그럼 형이라고 불러야겠네.”

됐어. 액면가는 네가 나보다 높잖아.”

 

만득이가 삼수를 한 건 입시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계공학부에 입학해 신나는 대학 생활을 누리던 어느 날, 선배들이 실험실에서 쇠를 깎는 모습을 보고 도저히 저건 못하겠다.’ 싶어 재수를 택했다. ‘좋아, 그럼 순수학문을 하자!’ 물리학도를 꿈꾸며 자연과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아뿔싸! 그만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말았다! 불같은 사랑과 처참한 이별은 그의 성적표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글렀다. 이 성적으로 물리학 전공은 요원한 일이다. 그는 삼수를 결심했다. ‘똑똑한 법대생을 만난다고? 그럼 난 무식한 공돌이가 되리라!’ 그렇게 그는 삼수 끝에 전기공학부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 ** --- ** ---

 

 

대학 신입생 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정말 현역이에요?”라는 물음이었다. 노안에다 말투도 느끼하고 아재 농담이나 하면서 낄낄대니, 사람들은 나를 삼수나 사수 혹은 그 이상의 나이 지긋한 신입생으로 오해했다. 반면, 만득이는 동안이었다. 술집에 가면 늘 신분증 검사를 받았고, 학교에서 술을 마시면 선배들은 그를 술 심부름에서 제외했다. 슈퍼에서 만득이를 고등학생으로 오해하고 술, 담배를 팔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취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는 동안으로 인해 괴롭다고 틈만 나면 하소연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린 학생으로 알고 자꾸 반말하고 무시한다는 거였다. 나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네가 고생이 많다.”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얼마 전 만득이가 전화하더니 한참 말도 하지 않고 에효~, ~, ~” 한숨을 내쉬었다.

 

? 뭔 일 있어?”

아니…, 어제 와이프랑 휴대폰 사러 매장에 갔거든? 근데 나보고 아버님이래.”

애 아버지 맞잖아.”

애들은 집에 있고 와이프랑 둘이 갔단 말야. 네가 봐도 내가 아버님처럼 보이냐?”

아이고. 걱정도 팔자다. 우리 이제 누가 봐도 아저씨야.”

오늘은 처형이 만난다는 사람 데리고 왔는데, 나를 보더니 그러는 거야. ‘저보다 형님이시죠? 연배가 딱 느껴져요.’ 근데 그 인간이 나랑 동갑이거든. 저 용띠에요. 그랬더니 뭐랬는지 아냐? ‘그래요? 근데 왜 이렇게 삭았어요?’ 하아~ . 어이가 없어서.”

초면에 그런 말을 했다고? 또라이 아냐?”

그지? 하아…, 뭐 그런…….”

 

하소연이 한참 이어졌다.

 

근데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미안하네. 내가 널 파삭이라고 불렀잖아. 그래서 애들이 따라서 부르고.”

너였냐? 너였어? 그 별명 만든 게?”

 

파삭얼굴이 팍! 삭았다.’의 뜻으로 한때 내 별명이었다.

 

 

  1. * nomade : 유목민 (프랑스어) [본문으로]
  2. * 『백경(모비 딕)』의 첫 문장이 'Call me Ishmael.'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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