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rival) 명사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 비슷한 말 호적수(好敵手)


동아리 선배 서비 형은 자기보다 한 해 선배인 JJ 형을 라이벌로 생각했다. 정작 JJ 형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서비 형은 사사건건 JJ 형과 비교하고 자신이 그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JJ 형이 방학 때 『토지』를 완독하는 게 목표라고 하자 서비 형은 일주일 만에 『토지』를 다 읽고 『장길산』, 『태백산맥』, 『혼불』, 『임꺽정』……, 등의 대하소설을 한 달 만에 독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JJ 형이 교내 헬스장에서 운동한다고 하자, 서비 형은 스포츠 센터에 등록해서 수영과 쇠질로 몸을 만들었다. 딱히 갈등을 일으켰던 사건도 없었다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자신만의 경쟁은 내가 입학했을 무렵 절정에 달해 있었다.

“오늘 알바가냐?”
“네.”
“몇 시에 끝나?”
“아홉시요. 왜요?”
“그럼 끝나고 학교로 올래? 한잔하게.”

후배를 붙잡고 술타령하는 캐릭터가 아닌데다, ‘내 부탁을 거절하지 말아줘.’라는 표정이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알았어요. 근데 상계동에서 아홉 시에 끝나니까, 학교 오면 꽤 늦을 텐데, 괜찮아요? 형 인천에서 통학하잖아요.”
“어. 괜찮아. 얼마 전에 학교 앞에 자취방 구했거든. 시간이 너무 늦으면 너도 자고 가도 돼.”

그날 나는 당사자도 모르는 의문의 경쟁, JJ 형을 향한 서비 형의 라이벌 의식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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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 형은 연애 중이었다. 연애 상대는 우리 동아리, 소진 선배. 오랜 구애 끝에 작년 가을, 소진 선배가 서비 형의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소진 선배는 JJ 형을 연모했다. 고백도 몇 번 했다는데, JJ 형이 통 곁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라도 JJ 형이 손을 내민다면 그리 날아가겠다고 했다. 그걸 감수할 수 있다면 서비 형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다고, 자기도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고생이 어떤지 알기에 고민하다 내놓은 조건이라고 했다. 서비 형은 자신 있었다. 장미를 닮은 여인에게 어린 왕자가 되리라 다짐했다. 그때부터였다. 서비 형은 무조건 JJ 형보다 나은 사람이고 되고 싶었다.

“기타 좀 가르쳐줘.”
“기타요? 저도 이제 막 배우는 처진데, 누가 누굴 가르치겠어요.”

JJ 형은 동아리에서 기타리스트로 통했다. 누군가 ‘여기서 누가 기타를 제일 잘 치는가?’ 묻는다면, 재학생, 졸업생 이구동성으로 JJ 형을 꼽을 정도였다. 그는 매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JJ의 기타 교실’을 열었는데, 나는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공강 시간에는 팩차기하고 놀았고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하러 학교를 빠져나갔다. 나중에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는, 먼저 시작한 동기들과 진도가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과방이나 동아리 방에서 기타를 붙잡고 사는 지박령들에게 조금씩 배워 기타를 뚱땅거릴 수밖에. 요즘은 ‘비 내리는 영동교’에 꽂혀 주야장천 그 노래만 부르는 중이다.

“구아바 형한테 알려달라고 하죠?”
“안돼. 그 양반은 입이 너무 싸.”
“몰래 배우게요? 왜요?”
“조금 있으면 우리 만난 지 일 년이거든. 이벤트 해주려고.”
“오! 로맨티스트! 형, 쫌 멋진데?”
“딱 한 곡만 칠 수 있으면 되는데, 어떻게 안 될까?”
“무슨 곡인데요?”
“「오늘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 소진이가 신승훈 팬이거든.”
“노래는 연습했어요?”
“어. 요즘 노래방에서 그것만 한 시간씩 불러.”

서비 형의 순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방법을 궁리하다, 내가 배워서 알려주기로 했다. 깜짝 파티해주고 싶은 마음을 알기에, 동아리 사람에게 가르쳐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과 동기 중에 교회 밴드부를 하는 녀석이 있어서 부탁했더니, “그냥 그 선배를 여기로 부르지?”, “그 형이 낯을 많이 가려. 낯선 사람 앞에 서면 말이 잘 안 나온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하나하나 세심하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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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 형과 소진 선배의 연애는 반년 정도 더 이어졌지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고 당신을 만날 수 없다.’는 소진 선배의 선언에 종지부를 찍었다. 서비 형 인생의 첫 실연이고, 시련이었다. 형은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도 있더라.’며 소주를 꿀떡꿀떡 삼켰다. 만취한 목소리로 ‘이상하다.’고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이거 소주 맞냐.’고 몇 번을 물었다.

서비 형은 이후 짧은 연애와 긴 이별을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날 청첩장을 턱 내밀었는데, 상대는 놀랍게도 JJ 형이 소개해준 아가씨였다. JJ 형의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저 숭막[각주:1]이 나만 보믄 불타오르잖어. 내가 맥주 한 잔 마시면 지는 두 잔 마시고, 노래 한 곡 부르면 지는 꼭 두 곡을 불러야 직성이 풀린댜. 우리 안사람은 내가 무슨 큰 잘못이나 헌 줄 알어. 아예 안 볼 놈도 아니구. 워쩔 겨. 참한 처자 하나 점지해 줘야지.”

끊임없이 자신과 대결하는 후배에게 인연을 만들어준 JJ 형은 초등학교 동창을 제물로 바친 사연을 이렇게 털어놨다. ‘신랑 입장’이라는 말이 있기도 전에 성큼성큼 식장으로 들어간 서비 형이 쫓기듯 다시 나와 하객들에게 웃음을 안겼을 때였다.

 

  1. * 숭막 : 숙맥(菽麥)의 충청도 방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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