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사줘요! 엉아아~, 듣고 있어요? 술 좀 사줘요.”

안 취한 척 또박또박 발음하지만, 말투에 밴 진한 술 냄새는 감출 수 없었다. 나를 ‘엉아아~’ 하고 늘어지는 억양으로 부르는 녀석은 피벙장. 고향 동생이자 중학교 후배이며 군대 동기다.

“그려. 날 한 번 잡자.”
“뭔 날을 잡어요. 맨날 가게에 붙어있고만. 올해는 가게 반경 10m를 벗어나 본 적이 없어요.”

피벙장은 요리사다. 전역 후 중식 레스토랑 주방에서 오래 일을 했다. 결혼하고 인천에 자신의 가게를 차렸는데, 처가(妻家) 근처에 목 좋은 가게가 나왔다고 해서 어떤가 살펴보러 갔다가 덜컥 계약했다고 한다.

“고향 없는 놈한테는 서울이나 여기나 다 똑같어요.” 그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고향에 자기 가게 차리고 할머니 모시고 사는 게 꿈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할머니는 그가 주방 서열 2위에 올라 ‘조금만 더 배우면 한 사람의 요리사로 독립할 수 있겠다.’고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그와 동생을 남겨두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소풍을 떠나셨다. “형…,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부모님이 계신 곳이 고향이라고요. 저한테는 할머니 계신 곳이 그랬거든요. 근데…, 고향이 사라졌어요.” 고향,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추억이 있는 곳. 그는 고향이 사라졌다고, 이제는 명절에 갈 곳이 없다고 오래오래 울었다. 고향이 없으니 타향도 없고, 그에겐 서울이나 인천이나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아내가 좋다는 곳에 가게를 열었다.

쉬는 날은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토요일. 피벙장의 생활 리듬은 가게 일정에 맞춰져 있어서, 그를 만나려면 내가 인천으로 가야 한다.

“이번 달은 그렇고, 다음 달에 백신 맞고 함 놀러 갈게.”
“엉아. 휴가 언제가요?”
“왜? 계곡 가자고?”

휴가라…, 여름이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2008년 여름, 피벙장과 그의 친구가 만들어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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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였다. 건물주 할아버지가 에어컨 설치를 못 하게 해서[각주:1] 선풍기를 끌어안고 사는 나날이었다. 무더위에 선풍기도 지쳐 더운 바람을 뿜어냈다. “형! 밥 먹었어요?” 피벙장이 가게에서 탕수육을 가져왔다고 같이 먹자고 했다. 오늘따라 탕수육 주문이 많아서 만드는 김에 조금 더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시간이 맞으면 이렇게 만나서 술잔을 기울인다.

“형은 휴가 언제가요?” 피벙장은 곧 있을 휴가로 들떠있었다. 그는 같이 일하는 형들과 휴가 때 해운대에 가기로 했다. 노란 머리 팔등신 아가씨를 만나 불타는 연애를 하겠다고 설레발을 쳤다. 몸은 서울에 있지만, 그의 영혼은 벌써 해운대 앞바다에서 늘씬한 미녀와 로맨스를 나누고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과도한 기대가 걱정스럽긴 했지만, 나는 그가 꿈꾸는 대로 멋진 휴가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피벙장의 휴가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헌팅은 실패했고, 조개구이 먹고 장염에 걸려서 내리 설사만 하다 올라왔다. “뭔가 될라고만 하면 속에서 꾸르륵꾸르륵 소식이 오는 거예요.” 로맨스는 물 건너가고, 장염 때문에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고, 내리쬐는 햇볕을 우습게 보고 해변을 돌아다녔다가 피부가 익어서 허물이 벗겨졌다. “형. 내 인생은 왜 이러죠?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는 맥주를 질금질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걸로 인생씩이나 찾고 그랴. 주말에 언제 쉬냐? 시간 함 내봐. 계곡이나 갔다 오자.”
“계곡이요? 거기도 여자들이 많이 올까요?”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이 가련한 청춘은 오직 헌팅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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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영배가 자기도 같이 가믄 안되냐고 하는데요. 뭐라구 해요?”
“좋지. 근데 영배가 시간이 된대?”

영배는 피벙장의 오랜 친구로 피벙장처럼 중식당 주방에서 일했다. 당시 중국 음식점은 명절을 제외하고 문 닫는 날이 없어서, 직원들은 주중에 돌아가며 하루씩 쉬며 휴일을 챙겼다. 피벙장과 영배는 일하는 가게가 달라서 같은 날 쉬려면 먼저 날짜를 정하고 각자 일터의 직원들과 일정을 조율해야 했다. 손님이 많은 주말에 쉴 수 있는 건 한 달에 한 번뿐이어서 피벙장과 영배가 동시에 주말에 쉬는 건 드문 일이었다.

“네. 걔는 이제 휴가 가는 것 같더라고요.”

출발 전날,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이 바람을 타고 춤추는가 싶더니 이내 굵어져 유리창을 때렸다. 계속 이렇게 비가 쏟아지면 계곡에 물이 불어 야영하기 위험하다. ‘출발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는데, 아침이 되자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쳤다.

홈플러스에서 장을 보고 두 시간여를 달려 양평의 사나사 계곡에 도착했다. 계곡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살펴본 끝에 그늘지고 편평한 자리를 찾아 텐트를 쳤다. 아이고. 지친다. 어제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해서 그런지 피곤이 몰려왔다. 피벙장과 영배는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형! 엄청 션해요! 어여 들어와요.” 멀거니 녀석들을 쳐다보다 누웠다. 잠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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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소음에 눈을 떴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소리, 매미의 울음소리……, ‘여기가 어디지?’ 잠깐 당황했다. 코 고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피벙장과 영배가 곁에서 자고 있었다. 오후 세 시 사십 분,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인 시각. 텐트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시원했다. 피벙장과 영배를 깨웠다. “밥 먹자.”

녀석들이 실력을 발휘했다. 중식당 주방에서 오래 일한 경력이 빛을 발했다. 아이스박스에서 뭘 그리 꺼내나 싶었는데, 간밤에 준비한 음식이었다. 볶음밥, 제육복음, 잡채, 데친 오징어, 각종 과일……, 푸짐했다.

“퇴근도 늦게 했을 텐데, 이걸 언제 다 만들었어?”
“에이~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에요. 영배하고 둘이서 하니까 금방 했죠.”
“조리를 여기서 할까 했는데, 이제는 계곡에서 취사가 안 된다면서요. 그래서 아싸리 그냥 만들어왔어요.”

차가운 물에 넣어 두었던 술을 꺼내왔다. 피벙장의 휴가 이야기를 들으며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맞다! 오늘 야구 결승해요.” 피벙장이 휴대폰을 꺼냈다. 우리나라와 쿠바의 올림픽 야구 결승전이 오늘 저녁에 열린다고 한다. 휴대폰을 이리저리 옮겨봤지만, 채널이 잡히지 않았다. 계곡이라 전파 수신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야. 그냥 집에 가서 재방송으로 봐. 우승하면 어차피 케이블에서 주야장천 틀어줄 거 아녀.” 영배는 우리나라가 우승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까르르!”
아래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자리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래에도 야영하러 온 사람들이 텐트를 쳤는데, 친구끼리 놀러 온 아가씨들이었다. 영배와 피벙장은 ‘가서 말 붙여봐라.’, ‘같이 놀자고 하자.’, ‘음식을 갖다주면 어떻겠냐.’, ‘그냥 쿨하게 술 한잔하자고 할까.’ 한참을 쑥덕댔지만, 둘 다 소심해서 차마 용기 내어 다가가지 못했다. “혀엉.”, “엉아아~” 녀석들이 애타는 눈길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라고 별수 있겠는가. 낯가림이 심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영배가 제 앞의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더니 벌떡 일어섰다. “내가 다녀올게!” 그는 접시에 방울토마토를 담고 비장한 표정으로 내려갔다.  “저기요!” 그의 모습이 사라진 지 얼마 안 되어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했는지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피벙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네?” 누군가 대답했다. “저기…, 이거…….”

첨벙! 쾅!
뭔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떡해!”, “괜찮으세요?” 아래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기…, 근데….”
“네?”
“혹시…, 도에 관심 있으세요?”

피벙장이 뒷목을 잡았다.

영배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왔다.

“괜찮어? 다치진 않았어?”
“네. 괜찮아요.”
“춥다. 얼른 닦고 옷 갈아입어. 그러고 있음 감기 걸려.”

물끄러미 영배를 바라보던 피벙장이 갑자기 옷을 훌훌 벗었다. 속옷까지 모두 벗고는 성큼성큼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피벙장! 뭐해!”
“도 닦어요!”

그는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물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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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 그 얘긴 또 왜 꺼내요!”
“나는 잊을 수가 없어. 하얀 엉덩이! 한 마리 침팬지처럼 포효하며 계곡을 뛰어다니던, 피벙장의 그 달덩이 같은 하얀 엉덩이! 어찌 그걸 잊을 수 있겠어.”
“하하하하하. 엉아…, 응? 왜 이러지? 엉아, 혹시 엘리베이터 탔어요? 자꾸 소리가 끊기네. 제가 다음에 또 전화 드릴게요.”

피벙장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불같은 오후, 뜨거운 저녁, 낮의 열기를 고스란히 품은 바람이 창을 두드리는 한여름 밤, 고향 동생의 전화에 기억은 경기도 양평의 계곡 어름을 더듬었다. 그때 불었던 차가운 바람이 느껴진다. 오늘 밤 그곳에 가면 헌팅에 미친 꺼벙이 둘과 ‘영심이’의 경태를 닮은 어벙이 하나가 낄낄대며 술을 마시고 있을 것 같다.

 

  1. 정 설치하고 싶으면 설치해도 되는데, 이사할 때 에어컨을 그대로 두고 가라고 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