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속눈썹 파마를 했다. 우리 가족은 눈썹 숱이 적다. 그나마 아버지와 나는 태풍이 휩쓸고 간 여름의 논처럼 빈약하나마 존재감은 있는데, 동생과 어머니는 그마저도 없어서 일찌감치 눈썹 문신을 했다. ‘파마했다가 속눈썹 숱마저 줄어들면 어쩌나.’ 걱정스러운데, 동생은 결과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쁘게 잘 나왔다고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어머니가 사진을 확대해서 유심히 보시더니 자판을 꾹꾹 눌러 답장을 했다.

‘눈썹도 없는 게.’

10초도 안 되어 동생의 문자가 날아왔다.

‘오빠구만.’

동생과 나는 종종 어머니 휴대폰으로 장난을 친다. 동생은 어머니 목소리를 거의 모사하는 수준이라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속기 쉬운데, 나는 그쪽으로는 영 재주가 없어 금세 들통나고 만다. 문자는 복잡하거나 내용이 길어 품이 많이 들 때 외에는 어머니가 직접 보내시는데, 동생은 답장을 내가 했다고 단정했다. 어머니께 휴대폰을 받아 문자를 보냈다.

‘아녀. 엄마여.’
‘이~ 이~.’[각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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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무렵 개인 홈페이지가 유행했다. 나모 웹에디터 강의가 인기였고, 하이홈이 선풍을 일으켰다. 동아리, 과 학회, 향우회……, 이런저런 모임의 홈페이지가 만들어졌다. 모임의 성격은 제각각이었지만, 홈페이지 메뉴는 대동소이했다. 대문이 있고, 각종 게시판이 있고 방명록이 있었다. 나름 컴퓨터 도사들이 만든 까닭에 디자인이 깔끔하고 당시 유행했던 기능은 모두 구현되어 있어서 놀기도 좋았다.

어느 홈페이지나 익명게시판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넋두리나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고민이 올라왔다. 어느 날 누군가 ‘연애가 너무 힘들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곧 답글이 달렸는데, ‘내가 그래서 연애를 안 하지. 케케케케케케.’ 이런 내용이었다. 글쓴이가 발끈해서 그 댓글에 답을 남겼다. ‘너 찬샘이지?’ 연이어 댓글이 달렸는데, ‘스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찬샘아. 요즘도 이러고 노냐?’,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염장은 찬샘에게.’……. 다들 나를 첫 댓글 작성자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억울했다. 내가 언제 연애를 ‘안’ 했단 말인가. 나는 연애를 ‘못’ 하는 거였다. 아니 연애는 혼자 하나? 상대가 있어야 하지! 내가 못 생겨서 연애를 못 하는 거였는데, 이 자명한 사실을 몰라주는 사람들이 야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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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에서 예비역으로 신분이 바뀌고, 복학한 지 일 년이 지났을 때였다. 군대 물도 다 빠졌고 인사를 주고받는 후배들도 제법 생겼다. 과방 앞 사물함을 일제히 정리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그동안 사물함 운영이 주먹구구식이어서 불만이 쌓이던 차에 학생회에서 나섰다. 사물함 이용자를 전수조사하고 이용 신청서를 다시 받는다고 했다. 만약 기한 내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내용물을 임의처분하겠다는 경고가 적색으로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전에 JJ 형이 자신이 쓰던 사물함을 물려준다고 했을 때, 거절했었다. 알음알음 사물함 사용자가 전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다.

얼마 후, 공강 시간에 과방에 갔는데,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형!” 후배가 반색하며 나를 맞았다.

“형! 내가 형 책 챙겨놨어요. 잘했죠?”

신청서가 접수되지 않은 사물함을 강제 개방하고 물건을 라면 박스에 담고 있다고 했다. 책머리에 내 이름이 있어서 단박에 알아봤다고.

“내 책? 내 책이 왜 거기에 있어?”
“그걸 형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자, 봐요!”

후배가 책을 턱 건넸다. 책머리에 네임펜으로 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늙은이 옹(翁)」이었다.

“형! 이건 혁이 형 책 맞죠?”

표지를 넘기자 면지에 크게 「개」라고 쓰인 글자가 보였다.


  1. * ‘그래.’의 충청도 방언.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의미로 활용되는데, 여기서는 ‘거짓말인 거 다 알지만, 노력이 가상하니 속아주겠다.’는 의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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