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휴학 후 복학할 무렵 구한 자취방은 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다가구 주택의 2층이었다. 공동화장실이 한 쪽에 있었고 내 방은 계단을 올라 오른쪽 끝 방이었다. 계약서상 정식 명칭은 201호.
맞은편에 늘어선 건물 1층에는 실내 포장마차와 치킨집, 꽃집, 중국집 등등이 있었다. 그때는 노점처럼 밖에서 음식을 굽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실내 포장마차에서는 곱창을, 치킨집에서는 메추리꼬치를 마치 경쟁하듯 구웠다. 영 갈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날 친구들과 집에서 술을 마시다 안주를 사러 나왔다가 포장마차 사장님과 안면을 텄다.
“대학생인가봐요.”
“네.”
“난 Y대 나왔어요.”
학교-알바-집. 순서만 바뀔 뿐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단조로운 생활 패턴이었는데 자취방에 들어서면 영락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맞은편에서 장사를 하는지라 내 방 창이 빤히 보이는데 불이 켜지면 ‘얘가 집에 들어왔구나.’한다고 했다.
“밥 안 먹었지? 밥 먹으러 와. 먹었으면 술이나 한잔 하고.”
한 번 두 번 오가다 어느새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고 한때는 꽤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 어느날 사이가 틀어졌는데, 사람을 내리 깔아보는 시선과 슬쩍슬쩍 무시하는 말투가 짜증 나서였다. 당시 나는 준비하는 시험이 있었고 그 분은 장사를 접고 식품회사 부사장 자리에 있었다.
[ 너 시험 될 거 같냐. 내가 어떻게든 너 시험 떨어지게 만든다. ]
"앞으로 연락하지 마시라." 했더니 뭐가 그리 분한지 이런 유치한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헤어지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 ** --- ** ---
“처남. 혹시 옛날에 처남집 앞에 있던 곱창집 사장님 기억나?”
“누구요?”
“자네 대학 다닐 때 포장마차 했던 양반 있잖아.”
“아! 그 분요. 왜요?”
“얼마 전에 길에서 봤는데, 자네 전화번호를 묻더라고. 그래서 처남한테 물어보고 알려준다고 했지.”
밥을 먹다 매형이 명함을 건넸다.
출판, 인쇄, 홍보대행을 한다는 회사 이름이 박힌 명함이었다.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집에 오는 길, 재활용 쓰레기 종이함에 명함을 휙 던졌다.
--- ** --- ** ---
재작년 연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헤어지던 중이었다. 다들 가고 한 녀석만 택시 태워 보내면 된다. 친구는 헤어지는 게 아쉬운지 “너희 집에 가서 한잔 더 하면 안 되냐.”라고 계속 보챘다.
“찬샘아!”
이 동네서 이 시간에 나를 이렇게 반갑게 부를 사람이 있었나?
돌아보니 오래전 ‘실내 포장마차’ 사장이었던 그분이다.
“아!”
“야! 반갑다! 이게 얼마만이냐!”
우리가 반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닐 텐데?
“이 동네 살아? 난 여기서 일하잖아. 전에 네 매형 만나서 명함 줬는데 못 받았어?”
“받았어요. 근데 제가 일이 많아서...”
“그랬어? 잘했다. 이렇게 만나려고 그랬나보다. 술 한잔 할래?”
“선약이 있어서요. 친구랑 술 마시기로 했거든요.”
“음... 그럼 나중에 보자. 전화번호 알려줘. 연락할게.”
친구가 씨익 웃었다.
“그 선약 있다는 친구가 나냐?”
그날 친구와 밤새 달렸다.
--- ** --- ** ---
사는 곳과 그 분 일하는 곳이 가까워 가끔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면 주로 듣는 편인데, 내용은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직장에서 얼마나 인정받는지 그리고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직원이 얼마나 형편없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 어린 상사를 모시는 슬픔과 애환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말끝은 항상 자신이 사업할 때를 이야기하며 “나는 실무자 우선이었어. 실무자를 최고로 대우해줘야지.”였다.
설 즈음이었다.
“백만 원만 빌려줘. 내가 다음주, 아니 삼일 후에 줄게.”
“제가 여유가 없네요.”
“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통장에 백만 원도 없어?”
“통장관리를 어머니께 맡겼거든요.”
이 양반 기억은 할라나?
전에 가게가 도시가스 끊기고 전기 끊기고 아주 문 닫을 판이라고 사정하며 내게 돈 빌렸던 거. 돈이 없다고 했더니 액수를 낮춰가며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꼭 주겠다고 부탁한다고 조금이라도 안 되겠냐고 해서 30만원 부쳤던 거. 그리고 한 달 동안 연락 두절 되었던 거. 그런데 그 돈이 수험서적 주문했다가 취소하고 환불받아 보내준 거였다는 거. 내가 준 돈으로 덕분에 중고등부 수련회 잘 다녀왔다고 그까짓 30만원, 지금이라도 줄 수 있지만 하나님께 드렸다 생각하라고 쩨쩨하게 굴지 말라고 이야기해서 사람 기함하게 했던 거. 네가 사지 못한 책만큼 시험에서 하나님이 보답을 하시니 감사하라고 말했던 거.
사람을 바보로 아는 게 틀림없다.
지금 없는 돈이 삼일 후에 어디서 생기겠는가.
딱 잘라 거절했다.
[ 너랑 나랑 사이가 이것밖에 안 되냐 ], [ 난 너를 믿었다 ], [ 내가 전부터 이야기 했는데 이러기냐.]... 등등의 문자가 매일 날아왔다. 명절 즈음이었고 바빠 답장을 못했더니 나중엔 온갖 욕설이 담긴 문자를 보내 내가 왜 이 사람과 거리를 두었었는지를 다시금 상기시키게 했다.
'섞일雜 글월文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나절은 한나절이 되고 (0) | 2016.12.22 |
---|---|
강아지 (2) | 2016.12.19 |
에라이! (0) | 2016.10.18 |
좋아? (0) | 2016.10.17 |
구아바 형 이사기(移徙記) (3) | 2016.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