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망각한 바람이 춘풍인양 유리창을 두드리던 날이었다. 휴일이었고 아무런 약속이 없었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세탁기를 돌리고 오후엔 빨래를 개켰다.
“뭐하냐?”
“빨래 개고 있어.”
“내일 뭐해?”
“일하지.”
“언제 끝나?”
“왜?”
“내일 법원에 가야 하는데, 공돌이라 그런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맨 광고하는 놈들 뿐이고, 네가 판례를 보면 알기 쉽대서 그것도 봤는데 그건 거의 외계어 수준이고…”
거절할 것 같았는지 말이 빨라지고 장황해졌다.
까르푸의 직장 생활은 우여곡절이 많다. 첫 직장은 회사가 문을 닫았고, 두 번째는 적성에 안 맞는다고 뛰쳐나왔다. 지난 직장에선 사장한테 사기를 당해서 2,000여 만원의 돈을 떼였고, 이번 직장은 연봉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내내 투덜댔다. 요령이 있는데다 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타입이라 늘 두 사람 세 사람 몫의 일을 해내는 덕에 어디에서든 인정을 받았는데 유독 그에게는 사람운이 따르지 않았다. 법원이라면, 몇 년 전 사장에게 빌려주고 받지 못한 돈을 해결하기 위함일 것이다.
“몇 신데?”
“한 시. 열두 시에 만나서 밥 먹고 들어가자.”
“알았어.”
“고마워.”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내려 놓는데, ‘약속시간을 너무 빡빡하게 잡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을 것이다. 녀석에게는 시간약속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다. 고향 내려가는 기차표를 어렵게 예매해 놓고 단 한 번도 탄 적이 없고 대학 면접때도 늦어서 단독 면접을 본 입지전적인 인물이 아닌가!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뇌 구조 자체가 이상해서 그렇다. 그래서 난 녀석과 만나기로 한 날이면 약속시간에서 딱 20분만 더 기다린다. 두 세시간 늦은 뒤 어디 있냐고 방방 뛰는 녀석에게 대차게 지랄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까르푸는 만나기로 한 날이면 정확하게 20분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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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시는 무슨… 오늘도 까르푸는 약속시간에서 20분 늦었다.
퇴직금 관련해서 고용노동부에서 상담을 하고, 금전소비대차에 관련한 문제를 신청하고 법원을 나섰을 때는 해는 지고 길은 이미 어둑어둑해졌을 무렵이었다.
“저녁은 너희 동네 가서 먹자.”
까르푸가 마치 선심쓰듯 말했다.
“지쳤지? 술을 됐고 근처에서 밥이나 먹자.”
“아녀. 그래도 온종일 고생 했는데 내가 고기에 쐬주는 쏴야지. 뭐 먹을래?”
“야. 온종일은 아니지.”
“난 한 삼 일은 밤 샌 거 같어.”
집 근처로 옮겨 갈비를 시켰다. 까르푸는 허기가 졌는지 선지해장국을 곁들여 먹겠다고 했는데, 그날따라 음식이 이상했다. 갈비는 푸석푸석하거나 질겼고 푸성귀는 시들시들했다.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가자.”
생맥주나 마시고 헤어지는 편이 좋겠다 싶어 술집에 들어섰는데, 희동이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주를 시킨지 5분도 채 되지 않은 터였다.
“야! 건너와! 간만에 얼굴 좀 봐야지!”
“형. 다음에 봐요. 까르푸랑 전작이 있는데다 지금 2차 왔거든요.”
“그럼 내가 갈까?”
오후 7시 47분. 그때까지 마신 술은 소주 반 잔.
“에효. 우리가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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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말끝마다 웃음이 터졌다. 한때 자칭 학원계의 기린아, 타칭 부랑아였던 선배의 입담은 여전했다.
“그러니까, 우리 아들 과외 해 줘 인마! 형 좀 도와줘!”
“제가 학원 강사 그만둔지가 언젠데 그러세요.”
“형! 수학은 내가 자신있어!”
“넌 기술이나 배워 인마!”
술자리는 늦은 시각까지 이어졌고, 우리는 내내 웃었다.
덧 ; 한나절은 하루낮의 반을 말한다. 즉 아침부터 점심, 혹은 점심부터 저녁까지의 시간이다. 반나절은 한나절의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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