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푸가 입원했다. 그는 허리디스크로 꽤 오래 고생을 했는데, 몸에 칼을 대는 것이 달갑지 않아 진통제와 비수술적 치료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텼다. 작년 여름에 허리에 시술을 받아 그럭저럭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봄이 오는 길목,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어쩐지……. '얘가 뜬금없이 왜 자꾸 하트를 날리나.' 했다.”
“심심해 죽겄어. 하트 좀 보내줘.”
“언제 퇴원인데?”
“오게?”
“가야지.”
“이깟 일로 뭣 하러 와. 괜찮여.”
알고 있다. 말로는 괜찮다고 뭐하러 오느냐고 틱틱대지만, 까르푸는 오늘부터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처럼 나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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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요즘 무슨 책 읽어요?”
“「오만과 편견」”
“마이크 형은요?”
“「태엽 감는 새」”
“역시…. 배운 사람들은 툭 찌르면 나오는구나.”
K가 심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어제 여자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요즘 무슨 책 읽냐고.”
“그랬는데?”
“그래서 제가 그랬죠. '나 책 안 읽는데?'”
“음….”
“그랬더니 실망한 표정이더라고요.”
K는 배움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학교 다닐 때 운동만 해서 못 배웠다.'라는 생각이 그의 의식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무식하다.’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한때는 신문을 줄을 쳐가며 읽었다. 책과는 담을 쌓았지만, TV 교양 프로그램이나 이런저런 다큐멘터리로 구축한 상식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운동도 머리가 좋아야 잘한다. 청소년 대표까지 했던 녀석이니 머리도 꽤 좋은 편인데, “형. 나는 공부랑은 담을 쌓아서 머리가 돌이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여자 친구는 무슨 책 읽는다는데.”
“「댄스 댄스 댄스」 읽는 대요. 일본 소설이라는데, 형 알아요?”
“하루키 책이네. 마이크가 읽는 책이 같은 작가가 쓴 거야.”
“형. 무슨 책 읽는다고 했죠”
K가 마이크에게 물었다.
“「태엽 감는 새」 정확한 제목은 「태엽 감는 새 연대기」”
“무슨 내용이에요?”
“바람피우고 집 나간 마누라 찾는 남편 이야기.”
“아…. 혹시 「댄스 댄스 댄스」도 읽어봤어요?”
“아니. 찬샘이는 읽었을걸?”
K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뭐 대충대충 그냥저냥 읽긴 했는데…, 별로였어.”
얼마 전 하루키 소설을 다시 읽었다. 20대엔 독특하고 발랄하다고 생각했던 표현들이 지금 보니 오글거린다. 감성마저 늙어 버렸나.
“형이 읽는 책은 무슨 책이에요?”
“「오만과 편견」? 그건…”
“할리퀸 로맨스지.”
마이크가 툭 끼어들었다.
“할리퀸 로맨스요?”
“어. 여중생이 환장하는 그런 이야기.”
“형이 왜 그런 책을….”
“몰랐어? 얘가 왜 살을 뺐겠냐. 이거 때문이지. 이거.”
마이크가 새끼손가락을 펴고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찬샘 형 요즘 연애해요?”
술에 취해 의자에 널브러져 자던 깐돌이가 부시시 일어났다.
“뭐? 찬샘이가 연애한다고?”
녀석이 내 멱살을 잡았다.
“너 이 새끼. 접때 교회 갔다고 했을 때 수상하다 했어. 누구야! 권사님 조카? 장로님 딸?”
“그냥 자라. 이따 갈 때 깨워 줄게.”
내 모든 스캔들의 원흉은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 마이크의 입이다. 이걸 한 대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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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두 시. 병실은 조용했고 까르푸는 커튼을 치고 누워 있었다.
“괜찮어?”
“아니. 좋았다, 안 좋았다 그러네.”
옥상에 올라가 커피를 마셨다. 볕은 따가웠고 바람은 찼다. 꽃샘추위가 찾아오고 있었다.
“너 연애한대매.”
“하지. 얘랑.”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깐돌이가 그러던데? 너 연애한다고. 교회 아가씨람서.”
마이크가 쏘아 올린 작은 농담이 깐돌이를 타고 여기저기 퍼졌다.
수도승처럼 살고 있는데, 연애는 무슨 연애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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