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양짓말의 알아주는 씨름꾼 박 씨가 행티고개서 도깨비와 씨름하다 자빠져서 앓아누웠다고, 읍내까지 나가서 용하다는 침쟁이 여럿을 들였지만 영 차도가 없다고, 도깨비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옥시기도 고추대도 다 뿐지르겠다 1.’고 으름장을 놨다는 흉흉한 이야기였다.
며칠 후, 어린아이 주먹만 한 얼음덩어리가 하늘에서 우수수 쏟아졌다. 초여름, 마을을 강타한 우박은 농작물에 큰 피해를 가져왔다. ‘산신제를 안 지내서 그렇다.’, ‘장승을 옮겨서 동티가 들었다.’…, 이야기가 분분한 가운데, 누군가 조심스레 양짓말 박 씨 이야기를 화제로 올렸다.
“뭐여. 도깨비가 그런 겨?”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박 씨 집으로 몰려갔다.
“어뜨케 된 겨?
“말 좀 혀 봐.”
사람들의 성화에 박 씨가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유…,”
--- ** --- ** ---
“야?”
박 씨는 황당했다. 큰말 사는 사촌 형의 밭에서 품앗이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웬 덩치 큰 사내가 길을 막고 “여기를 지나려면 통행세를 내라.”고 했다. 돌부리 가득한 길을 지나다니기 좋게 닦아놨으니, 수고비를 받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것네. 누가 지더러 질바닥 닦으라고 했남? 왜 나한테 지랄여.’
집으로 가는 길이 꼭 그 길을 지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박 씨는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짚어 조금만 가면 집으로 가는 다른 길이 나온다.
“허어! 도망가는 겨? 아니, 뭐가 무서워서 줄행랑을 친댜. 씨름 한판 하는 게 뭔 대수라구. 자지를 어따 뗘 놓은 거 아녀?”
괜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박 씨의 마음에 불길이 치솟았다.
“뭐여?”
첫 십여 판은 손쉽게 이겼다. 하지만, 판이 거듭될수록 힘이 샘솟는 것 같은 사내가 점점 버거워졌다. 스무 판에 가까워질 무렵 처음으로 박 씨가 먼저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히히히히” 그 후 십여 판을 더 벌였으나, 박씨는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히히히히. 인제 됐슈.” 비웃는 듯한 사내의 묘한 웃음이 박 씨를 자극했다.
“한 판 더 해유.”
“됐슈. 히히히히.”
“허! 고작 멫 번 이기구 배짱여? 이번에 내가 지믄 이거 준다!”
사촌 형수가 싸준 음식을 걸었다. “그게 뭐유?”, “뭐긴, 뭐유. 메밀묵이지.” 사내의 울대뼈가 위아래로 미친듯이 움직였다.
“딱 다섯 판만 더 혀.”
“내가 이기믄 그거 주는 거유?”
“입 아프게 뭔 말을 자꾸 말을 붙인댜. 할 거유, 말 거유?”
“해유!”
박 씨는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자신을 땅바닥에 눕힐 때마다 “히히히히” 좋아 죽는 사내의 웃음에 점점 화가 났다.
“한 판만 더 혀.”
“됐슈.”
“돼지! 이번에 내가 지믄 우리 집 돼지 한 마리! 어뗘?”
“돼지유?”
사내가 연신 침을 삼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빨리 말 혀! 할 겨, 말 겨?”
“혀유! 혀!”
이후로 수십 여 판을 더 벌였지만, 박 씨는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내기는 점점 커졌다.
“텃골에 있는 논! 그거 건다!”
“됐슈.”
사내는 심드렁했다.
“해 뜨겄네. 가유.”
사내는 소가 꼬리로 등에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안 하믄 이것두 없는 겨.”
박 씨는 메밀묵 보따리를 들고 을러댔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짐짓 자리를 떠나려 하자 사내가 박 씨를 붙잡았다.
“이런 게 어딨슈."
“그럼 한 판 더 할 겨?”
“아, 그짝은 백 판 더 해 봤자, 인자 나한테 안 돼유.”
“그럼 말구.”
십 리 길이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사내는 약속을 지키라고, 메밀묵이라도 달라고 졸랐지만, 박 씨는 요지부동 씨름을 안 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딱 잘랐다.
“정말 이럴 겨?”
집에 이르러 대문을 열자 사내가 벌컥 화를 냈다.
“이르구 그냥 가믄 내가 옥시기고 고추대고 뭐고 다 뿐질르 겨!”
“맘대루 혀!”
쾅!
박씨는 대문을 닫고 사랑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정말 이럴 겨?”
사내가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박 씨는 귀를 닫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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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루 아픈 겨?”
“야.”
사랑방이 침묵에 휩싸였다.
- * 옥시기 : 옥수수의 충청도 방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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