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라 부르기엔 다방에서 계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를 마셔야 할 듯싶고, 소개팅이라 하기엔 밀러타임의 시끄러움에 채 30분을 앉아 있지 못하는 노땅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 친구의 사촌 동생을 소개받았다. 생판 초면은 아니고 친구 결혼식과 큰 조카 돌잔치에서 만나서 맥주 마시며 안면은 텄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서로 만날 시간을 조율하다, 마른장마가 한창인 6월 말 신사역 8번 출구에서 만났다.
저녁 먹기는 시간이 애매해서 차 한잔하기로 했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친구의 사촌 동생은 휘핑크림을 얹은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이야! 오빠 옛날 그대로네! 살 많이 쪘다고 들었는데, 다이어트했어?”
내가 얘랑 안면 튼 건 기억하는데, 말까지 텄었나?
“몸이 무거우니까,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많아서.”
“잘했네. 나이 먹고 연애도 못 하는데 뚱뚱하기까지 하면 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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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장마에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저녁때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밤의 서늘함을 품은 바람이 가로수 잎을 쓱 한번 만지고 덥수룩한 내 머리카락과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그 녀석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밥 먹어야지. 오빠 뭐 좋아해?”
“자꾸 오빠라고 부르지 말어. 내 동생이랑 헷갈리잖어."
“오빠 동생이 이렇게 이뻐?”
“너보다야 이쁘지.”
“하! 뭘 모르시네. 여잔 나이가 깡패거든! 남자들이 왜 어린 여자 좋아하는지 알아?"
"글쎄."
"예뻐서 그래, 예뻐서. 오빠 동생 나보다 나이 많다며.”
“서른일곱이 어린 나이냐?”
“아이고~ 어르신. 나이가 마흔한 개라 행복하셔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버릇없는 요즘 애들’을 상대해온 만렙 초딩교사의 말발은 당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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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오빠.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저녁은 콩나물이 잔뜩 들어간 코다리찜. 접시에 덜어 후후 불어 식히더니 입에 잔뜩 넣었다. “하아~ 스읍~ 하아~” 아직 뜨거운지 입안에서 마저 식히다가 우물우물 입안에 든 걸 씹으며 말을 꺼냈다.
“충청도 사람은 ‘사랑했지만’을 어떻게 불러? 사랑했어유~ 그대를 사랑했어유~ 이러나?”
“아니. 사랑했시유~ 그짝을 사랑했시유~ 이렇게 불러.”
“진짜?”
진짜겠니? 느이 사촌 큰 올케가 전라도 순천 사람이라며. 노래방서 말끝마다 ‘거시기’ 넣어서 노래 부르디?
“그럼! 경상도에서는 어떻게 부르는 지 알아?”
“어떻게?”
“사랑했으예~ 금마를 사랑했으예~”
“우와! 오빠 되게 똑똑하다!”
녀석은 박수까지 치며 감탄했다.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이거 나 멕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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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일이 있어서 노원에 들렀다가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학교 앞을 한 번 둘러보고 근처 작은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오빠!”
딸랑! 하는 문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찍 나왔네? 일이 많아서 다섯 시 넘어야 끝날 것 같다더니.”
“내가 원체 손이 빠르잖어. 부리나케 끝내 놓고 나왔지.”
찻집을 나와 버스를 타러 가는데, ‘방과 후 학습’을 끝내고 교문을 나서던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우르르 몰려왔다.
“선생님!”
“이제 집에 가니?”
“네! 근데 옆에 누구예요?”
“선생님 남자친구예요?”
녀석이 갑자기 시청자 문제를 내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의 손범수처럼 양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오늘의 퀴즈! 옆에 있는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선생님 애인일까요, 아닐까요!”
“맞히면 상품 있어요?”
“월드콘!”
“우와!!!”
한참을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저만치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야! 우리 선생님 눈 높댔어!”
“저 아저씨는 못생겼잖아. 아니야.”
한때 학원계의 기린아로 뭇 학원생의 아이돌로 추앙받던 때가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은데… 하… 세월 무상이다.
“킥킥. 들었어? 오빠, 못생겼대.”
“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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