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부모님은 텃밭에 이런저런 곡식을 심는다. 마늘, 대파, 감자, 고추, 가지, 호박, 방울토마토, 콩, 도라지, 더덕……. 이런 곡물은 여름 가을 동안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고, 가을이 올 무렵 심는 배추는 겨우내 먹는 훌륭한 김치가 되어 식탁에 오른다. 재작년부터는 텃밭에 고구마도 심는다.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는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 동안 어머니의 훌륭한 간식으로, 입이 심심하신 아버지의 군것질거리로 제 몫을 톡톡히 한다.
몇 주 전부터 어머니는 장날이면 고구마 순을 사 오셨다. 고구마를 심을 시기가 되면 모종값이 오르는 터라 저렴할 때 미리 사서 밭에 살짝 심고, 추우면 비닐을 덮고 가물면 물을 주며 금이야 옥이야 살뜰히 가꾸셨다. 휴대폰 날씨 앱을 보며 고구마 순을 심을 시기를 가늠하셨는데, 최저 기온이 0℃~4℃를 오르락내리락해서 순을 심지 못했다. 5월은 너무 늦다고 걱정하셨는데, 다행히 오늘부터 기온이 올라간다고 한다. 어제 밭에 물을 주고 오늘 어머니와 고구마를 심었다.
어머니가 꼬챙이로 모종을 푹 찔러 넣으면 내가 따라가면서 호미와 모종삽으로 흙을 돋우어 구멍을 메웠다. 이랑을 크게 만든 터라 한 줄에 세 개씩 심었는데, 세 이랑을 미처 채우기 전에 고구마 순이 떨어졌다. 성글게 심어야 하는데, 처음에 배게 심은 탓이다. 나중에 알아채고 간격을 조정했지만, 모종이 꽤 부족했다. 어쩔 수 없다. 다음 장에서 고구마 순을 더 사서 마저 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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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아부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CCTV가 이상하다고 아파트로 오라고 하셔서 바람막이 걸치고 터덜터덜 걸어 아부지 일하시는 아파트로 향했다. 재활용 분리수거 장소를 비추는 CCTV 화면이 하얗게 변해서 사물을 식별할 수 없었다. 바람이 제법 불었는데, 카메라가 바람에 흔들리다 어느 순간 초점이 맞아 화면이 정상으로 나왔다가 다시 백화현상이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렌즈 문제인가? 아버지는 자신이 뭘 잘못 건드려서 그런 줄 알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매제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매제는 현장 일이 꽤 바빠서 전화를 받을 여유가 없다고 했다.
“아부지. 카메라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화면이 돌아왔다 나갔다 하지요? 그건 아부지가 뭘 건드려서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기계가 노후하면 그럴 수 있대요. 소장한테 CCTV 화면에 이상이 생겼다고 말씀하시고 AS 받으시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은 듯 보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전기 관련 일을 하는 이종사촌 형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고, 알려준 대로 CCTV 케이블을 꽉 끼웠더니 화면이 정상 출력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결했어.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했어.”
“다행이네요. 식사는 하셨어요?”
“인제 먹어야지.”
“아이고.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 저녁도 안 드셨어요.”
“먹을겨 이제. 너는? 하마 먹은겨?”
마음의 짐을 날려 버린 듯, 아버지의 목소리가 통통 튀었다.
그 걱정을 헤아리지 못한 소홀함에 속이 쓰렸다. 나는 언제쯤에야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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