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기억은 알코올과 같아서 잠에서 막 깼을 땐 선명하지만, 잠깐의 시간이 흐르면 휘발해 버린다. 기억에 남는 건, ‘내가 꿈을 꾸었다.’라는 사실 뿐이다. 그렇게 많은 꿈을 놓치고 언젠가부터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모든 꿈은 아니고 너무도 선명해서 그 느낌이 생생하거나, 재미있고 흥미로운 꿈인 경우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서둘러 적었다.
몇 년 전, 파묘(破墓) 이야기가 한창 나올 때였다. 꿈에서 옛날 우리집의 뜨락에 앉아 있었는데 할머니가 대문 너머로 집을 기웃기웃 거리며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 반가운 마음에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갔는데 할머니 뒤로 웬 비렁뱅이 여럿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할머니 친구예요?”
할머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 눈을 피했고, 뒤에 선 여러 비렁뱅이들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고 할머니를 재촉했다. 어? 어? 하는 사이에 어느새 마당. 순간 정신이 팍! 들었다. ‘할머니 돌아가셨지!’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이 사람들이 뭔데 할머니를 앞세워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나. 대체 왜. 마당에서 방으로 들어가려는 비렁뱅이의 어깨를 잡았다.
“누구시죠?”
비렁뱅이가 고개를 돌려 씨익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그 의사가 전해졌다. ‘네가 그래 봤자야.’
“뭐?”
순간 화가 치솟았다.
“이 새끼들이, 좋게좋게 대해주니까 누굴 호구로 아나.”
바지랑대를 가져와 문 앞에 서서 때릴 듯이 휘둘렀다.
“그려. 들어와! 들어오기만 해봐!”
들어오려다, 바지랑대를 피해 훌쩍 뒤로 물러선 비렁뱅이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가려는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아는 사람이에요?”
“몰러. 자꾸 나한테 밥 내놓으래.”
“저 인간들이 할머니 밥 다 뺏어 먹어요?”
할머니는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걱정하지 말고 말만 해요. 할머니 손자 승질 알죠? 내가 다 때려 줄게요.”
“아녀. 그런 거 아녀.”
누군가 부르는 듯, 흘끔흘끔 눈치를 보다 할머니는 서둘러 대문 밖으로 나갔고 안개 속에 묻히는 실루엣처럼 사라졌다.
그해,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 파묘는 없던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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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다시 파묘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번은 우리 집안만의 논의였는데, 이번은 종중 차원에서 하기로 결정한 일이다. 선산 바로 밑으로 왕복 4차선 도로가 날 예정이라 종회를 열었는데, 파묘로 종지(宗支)의 뜻이 모였다.
며칠 전, 오랜만에 할머니 꿈을 꿨다.
“할머니!”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 몰랐고 할머니는 반가우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뚱하게 대답했다. “왜! 왜 자꾸 부르는겨?”
뜨락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문 밖에서 누군가 기웃거렸다. 입성이 초라한 사람 몇몇이 집안을 들여다보는 게 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저 밖에 사람들,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뭐…, 몰러. 내가 뭘 알어?”
“할머니. 진지는 잡수셨어요??”
“진지는 무슨…. 니 엄마가 언제 나 밥 주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집에 내려가면 할머니는 며느리가 자신을 굶긴다고 내게 고자질을 했다. 엄마는 같이 드시고도 그런다고 무척 억울해했고.
“에이~ 할머니 밥 누가 뺏어 먹는다고 해서 엄마가 맨날 밥 세 그릇씩 놓잖아요.”
말을 하는 순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왜요? 이제 할머니 밥 안 챙길까 봐 그래요?”
“내가 뭐 그런 거 무서워할 줄 알어?”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사는 제가 챙길게요.”
대문 밖에서 기웃대던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야! 들어오기만 해~에! 아주 작살을 내줄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 바지랑대를 들었다.
“니네지? 우리 할머니 밥 뺏어 먹는 것들이. 시발. 함 해보자!”
대문 밖으로 나가 바지랑대를 휘둘렀다. 먹이를 눈앞에 둔 하이에나처럼 몇 발 뒤로 물러섰지만, 도망가지 않았던 비렁뱅이들이 내가 집으로 들어가려 하자 다시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 이 시방새들. 어떡해야지?”
씩씩대다 꿈에서 깼다.
어찌나 악다구니를 부렸는지 목이 컬컬하고 진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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