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언제 시간 되냐?


Bob이 오랜만에 연락했다. 서로 사는 곳은 멀어도 회사는 근처라 자주 볼 법도 한데, 그저 잘 살겠거니.’ 하다 경조사 때나 얼굴을 보곤 한다. 학교 다닐 때는 늘 붙어 다녔고, 사회에 나온 이후에도 한 달에 적어도 대여섯 번은 만났는데, 이젠 그때가 꿈인 듯 옛날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언제 시간 따졌냐.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음 만나는 거지.

 

호기롭게 답장을 한 다음 날, 회의를 끝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찍혀 있었다. Bob이다. 오후 내내 전화 통화가 되지 않자 녀석은 문자를 남겼다.


오늘 퇴근하고 보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 보는 대로 연락줘.

 

오늘은 곤란하다. 일이 늦게 끝나는 데다 주말에 집안일을 못 한 터라, 빨래가 산더미고 곳곳이 먼지투성이다. 부지런히 움직여도 자정 안에 끝내기는 힘들지 싶다. Bob에게 전화를 걸었다.

 

, 찬샘아. 오늘 시간 괜찮어?”

새신랑이 우짠 일이냐. 평일에 술을 다 먹자 허고. 뭔 일 있어?”

아녀. 그냥 얼굴이나 볼까 해서 그렇지 뭐어.”

오늘은 시간 내기가 그려. 내일이나 모레 어뗘?”

좋지. 저기 근데…, 너 누벨 형이랑 싸웠냐?”

?”

너 보는 김에 같이 볼까 해서 연락했는데, 네가다시는 연락하지 마라.’해서 만나기 껄끄럽다고 그러더라.”

내가 왜 그랬다고는 말 안 허고?”

물어보니까, 자기도 모르겠댜.”

하아~ 이 웬수. 하여튼 형이 아니라 동생이여.”

 


--- ** --- ** ---


 

누벨 형과의 말다툼은 시간약속에 대한 개념이 없는 형에게 내가 대차게 지른 데서 비롯되었다. 이 양반은 학교 다닐 때부터 뇌 구조에 약속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게 쌓이고 쌓이다 터졌다.

 

급한 일이라고, 너를 꼭 만나서 상의해야 한다고, 저녁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놓고 밤 10시쯤 [ 동아리 후배랑 밥 먹다가 깜빡했다. 기다렸냐? ] 라는 문자를 틱 보내지를 않나, 회사 앞으로 찾아가겠다고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니 기다려 달라고 해서 밤 11시까지 퇴근도 못 하게 만들고는, 다음 날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냐.’고 묻는 내게 어제는 너무 늦어서 연락을 안 했어.’라는 가당치 않은 대답으로 혈압을 치솟게 만들기도 했다. 새벽 한 시고 두 시고 가리지 않고 전화하는 사람의 변명치고는 너무 옹색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폭발했던 계기는 얼마 전에 일어났다.

중요한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오늘 잠깐 볼 수 있어?”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곤란해요. 왜요? 급한 일이에요?”

.”

무슨 일인데요.”

하아! , 사는 게 왜 이러냐. 그냥 막 죽고 싶은 거 있지. 대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것다. 딱 십 분만 시간 내주면 안 되냐?”

알았어요.”

 

약속 시각 10분 전.


생사여일!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누벨 형에게서 난데없는 내용의 문자가 날아왔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가 떠올라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마음이 급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누벨 형 집으로 달려갔을 때, 형은 거실에 누워 프로야구를 보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나를 보고 누벨 형이 그랬다.

 

별것도 아닌 걸로 왜 호들갑을 떨고 그려.”


 

--- ** --- ** ---

 


Bob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형 그거는 평생 갈 거 같어. 언제 정신 차린 대냐.”

그러게 말이다.”

근데 이팔청춘도 아니고 다 늙어서 뭔 절교여.”

절교 아녀. 다음 주나 다다음 주쯤 해서 연락하려고 했어.”

얼른 전화혀. 네가 그렇게 말해서 그 양반 크게 상처받은 거 같더라.”

그려. 알았어.”

 

누벨 형 이야기는 그것으로 일단락된 줄 알았다.

이 오지라퍼가 저보다 더한 오지라퍼에게 이야기를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 ** --- ** ---


 

후배 여리는 비공식 UN 평화 대사이며, 화해의 사도의 길을 걷는 사이비 성직자로 오지랖의 대가이다. 이 녀석은 사람들 간의 불화나 다툼을 보지 못하고 늘 중간에 끼어 중재를 꾀하는데, 문제는 당사자 간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화해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니,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이상한 사고의 소유자라 때때로 곤혹스러운 일을 벌인다.

 

! 고기 좀 사줘요. 여자 친구가 고기 먹고 싶다는데……, 주머니가 텅 비었어요.”

 

여리는 요즘 개인회생 중이다. 주식에 손을 댔다가 그동안 번 돈을 모두 까먹고 빚까지 떠안았다.

대개 그러한 상황이면 본전 생각에 그 판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데, 녀석은 깔끔하게 손을 털고 나왔다.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고 때때로 채권 추심 업체에서 걸어 놓은 이런저런 제한에 곤란을 겪고 직장에서 승진까지 누락되었지만, 일확천금 같은 헛된 꿈을 꾸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며 난국을 타개하려 아등바등 열심히 산다. 그 모습이 한편으로 기특하고 한편으로 안쓰러워 여리가 밥 사달라고 연락을 하면 가급적이면 시간을 내는 편이다.

 

! 나 밥 시켜도 돼요?”

시켜. 근데, 고기 먹고 싶다며. 차라리 고기를 더 먹지?”

헤헤. 미안하잖아요.”

 

고기 2인분을 추가했다.

후배가 걱정스레 여자친구에게 물었다.

 

자기 괜찮아? 더 먹을 수 있어?”

! 난 더 먹을 수 있어!”

 

알콩달콩 연애하는 커플을 보면 괜히 흐뭇하다.

자리가 파할 무렵 후배가 잠깐 자리를 떴다. 화장실 다녀오나 했는데, 들어오더니 휴대폰을 내민다.

 

. 받아봐요.”

누군데?”

! 그냥 받아요.”

 

화면을 보니 누벨 형 이름이 떠 있다. 여리에게 눈을 부라렸다. “왜 싸우고들 그래요.” 녀석이 종알거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찬새미냐?”

. .”

화는 다 풀렸어?”

화랄 것까지 있나요, 우리 사이에. 형은 내가 그 소리 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담서요?”

아녀, 오해여. Bob한테만 혔어.”

어디십니까.”

나 지금 집에 가는 버스 탔다. 너한테 가도 되냐?”

얼른 와요. 지달리고 있을게요.”

 


--- ** --- ** ---


 

다음 달, 누벨 형 생일쯤 해서 연락할까 했는데, 오지라퍼들 덕에 화해가 빨라졌다.

여리 커플을 보내고 누벨 형과 둘이 실내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 우리가 만나온 시간이 얼마고 쌓은 추억이 얼만데, 고작 그깟 일로 절교하고 절연하고 그럽니까.”

 

누벨 형이 히히 웃었다.

 

그려. 우리 찬새미. 성격이 지랄맞어 그렇지, 알고 보면 좋은 놈이여.”

중간에 이상한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기분탓이여.”

 

우리는 하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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