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렵의 일이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늘 막차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늦게까지 버스나 지하철이 다니지 않았고, 택시를 타려니 요금이 부담스러웠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최단 · 최적의 길을 찾았다. 이제 되었다. 막차 시간에 쫓겨도 집까지 가는데 걱정이 없다.

 

상계동에서 과외를 끝내고 아파트 앞에서 425번 버스를 탔다. 오늘은 답십리로 가야한다. 이종사촌 누나가 치킨집을 열어서 개업 축하하러 가기로 했다. 청량리로 가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거나 지하철을 타면 된다. 버스에 오르자 빗방울이 툭툭 창문을 두드리는가 싶더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부아앙~ 부아앙!

처음 탈 때부터 거친 소리를 토해내던 엔진이 버스가 회기역에 이를 무렵 완전히 멈췄다. 속절없이 30 여분이 흘렀다. 기사님은 곧 다른 버스가 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그 기약 없는 말에 넋 놓고 있다가는 막차를 놓칠 것 같았다. 빗방울은 아까보다 가늘어졌다. 이제 이슬비가 내린다.

 

기사님. 내릴게요.”

학생! 이거 가져가.”

아유~ 괜찮아요.”

 

기사님은 자신의 우산을 건네며 걱정이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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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기역이라고? 거기서 시립대로 올라와. 그 담에 길 건너서 57번을 타.”

 

회기역 계단을 올라 공중전화를 찾았다. 통화가 되었을 때, 매형은 당장 택시 타고 오라.’고 했다. “아직 버스 다녀요. 버스 타고 갈게요.” 매형이 가게까지 오는 길을 알려줬다. 위생 병원 옆길로 올라가면 시립대가 나오고 학교를 가로질러 정문 앞에서 57번 버스를 타라고 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매형이 알려준 길이 후일 회기 던전으로 불리는, 시립대 학생들도 때때로 길을 잃는 루트임을.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주택가 골목은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기 마련이어서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시간이 걸릴지언정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여기는 어찌 된 곳인지 수시로 막다른 곳이 나타났다.

 

다시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득한 시간을 헤맨 것 같다. 이제 내려가는 길도 못 찾겠다. 어느 건물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에 앉았다. 어떡하지. 시간은 거의 자정에 이르렀다. 여러 통의 삐삐가 왔지만, 공중전화가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 젖은 필터를 라이터로 말려 한 개비를 천천히 태웠다. 얼었던 몸이 녹는 것 같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누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다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

 

창피했다.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인 척 태연하게 빠져나오려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이 대뜸 나를 불렀다. “찬샘아!” 그 사람이 내게 한 발짝 다가섰다. 센서 등 아래 얼굴이 드러났다. 마이크였다. 같은 동아리라 안면은 있었지만, 오가며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그는 대뜸 나를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다 젖었네! 그러다 감기 걸려.”

 

마이크는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는 길이라 했다.

 

우리 엄마가 개코라서 집 근처에서 피우면 금방 걸리거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마이크가 타준 코코아를 마셨다. 부모님이 모두 주무셔서 조심조심 움직였다. 마이크가 준 옷은 조금 컸지만, 그런대로 잘 맞았다. 젖은 옷은 비닐봉지에 담아 가방에 넣었다.

 

고마워.”

고맙긴 뭘. 근데 가는 길은 아냐?”

 

그가 시립대 앞까지 배웅해준 덕에 무사히 이종사촌 누나네 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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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는 밤이면 마치 어제 일인 듯 그때가 생생히 떠오른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두툼한 머그잔, 하와이안 셔츠를 건네고 낄낄대던 모습, 가방에 손을 쓱 집어넣어 자신의 멀쩡한 담배와 내 젖은 담배를 바꾸며 지었던 악동 같은 표정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나 전화기를 들게 한다.

 

말보로 레드를 줘? 난 그때 디스도 독해서 잘 못 피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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