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걸이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은 텐션이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발음과 말투 그리고 목소리 톤을 보건대, 적어도 소주 세 병은 마셨을 것이다.
“찬샘! 뭐하고 이쏘옹?”
“형 생각하고 있죠. 형님 뭐 하시나, 연애는 잘 되시나, 뭐 이런 생각?”
“낄낄낄. 그진말! 다음 주 주말에 시간 괜찮아?”
“다음 주요? 22일?”
“응. 시간 안 괜찮아도 괜찮도록 해.”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태안 가자! 빼빼로가 태안에 있는 회사 콘도 빌릴 수 있대. 4층짜린데, 통째로 써도 된대. 빡네 식구랑 까르푸네도 간댔어. 찬새미도 가. 기민이 금마는 전화를 안 받고.”
취한 사람 치고는 브리핑이 빠르다. 혹 내가 거절할까 봐, 형은 숨도 안 쉬고 다다다 말을 토해냈다.
“비용은 한 사람당 10만 원 정도 생각하고 있어.”
“아, 그냥 오라고 혀요! 찬새마! 너는 몸만 와. 내가 다 책임질게. 그냥 오기만 혀.”
전화기 너머 빼빼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마셨나 보군.
“알았어요. 내일 통화해요.”
“그럼 가는 거다? 그렇게 알고 있는다?”
“네. 알았어요.”
20대의 우리는 그랬다. 술이 들어가면, 산이 강이 바다가 그 모든 낯선 장소가 우리를 부르는 것 같고 우리가 거기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훌쩍 떠나고 싶고,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몸도 가벼웠다. 그렇게 휴가를 가고 여행을 떠났다. 불혹을 넘은 지금, 그때처럼 ‘그래, 가자!’라고 선뜻 대답하기엔 이것저것 걸린 것이 많다. 형도 취한 와중에 그때를 떠올리고 기분만 내고 있을 공산이 컸다.
다음 날 점심때, 걸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찬샘.”
“술은 좀 깼어요? 속은 괜찮고?”
“응. 괜찮아.”
“콘도는 예약했어요?”
“저기…, 그게 말야. 내가 어제 몹시 업(up) 됐나 봐. 나 이번 달은 주말에 내내 풀(full)인데 그랬고만. 아이고….”
“많이 마셨어요?”
“그게 빼빼로가 빨리 마시잖아. 거기 맞추다가 훅 갔어. 어제는 초반에 맛이 갔네.”
그럴 줄 알았다.
“빨리 빡하고 까르푸한테 연락을 해야 할 낀데…….”
“기민이는요?”
“금마는 어제 계속 전화 안 받더라고.”
“알았어요. 얼른 몸 좀 추슬러요.”
창밖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듯한 날씨다.
태풍 루사가 상륙하던 날, 걸이 형과 술 마시다 청마 문학관 갔던 일이 떠올랐다.
전역하는 그 날까지 만두를 원 없이 먹게 해주겠다는 동원장교의 말에 속아 말년 휴가를 당겨 쓴 군바리와 짝사랑 하는 님에게 고백했다가 가차 없이 차인 걸이 형과 밥 사준다는 말에 좋다고 슬리퍼 질질 끌고 나왔던 Bob까지 이렇게 셋이 ‘충무 김밥이 과연 맛있는가.’를 주제로 밤새 술 마시며 논쟁하다, ‘원조 충무 김밥은 맛있다!’라는 걸이 형의 주장에 ‘그럼 확인하러 갑시다!’ 뜬금없이 통영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표면이 말라붙은 단무지, 중국산 김치, 스테인리스 그릇에 시래기 한두 조각이 둥둥 떠 있는 멀건 된장국이 전부인 시락국. 무말랭이, 오징어무침, 맨밥에 김을 말아 삼등분해놓은 충무김밥. 실망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청마 문학관으로 향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청마 문학관의 관람객은 우리뿐이었다. “우리 남원에 갈래? 거기 소진 선배 있잖아.”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우리를 무시하고 Bob이 선배에게 전화했고,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태풍 루사가 무섭게 비를 퍼붓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진주에서 버스가 끊겨 택시를 타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남원에 도착했다. 그렇게 남도 유람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그 후, 여름이면 종종 걸이형은 놀러 가자고 사람들을 부추겼고 우리는 산으로 바다로 전국을 쏘다녔다. 술 마시면 늘 그때 이야기를 하는 걸이형은 이번에도 그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올해 휴가는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냈다. 최대한 바닥과 밀착하여 굴러다녔다.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올해 사업을 시작한 형은 아직 일이 자리 잡지 못해 휴가 갈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비 그치면 힘든 여름을 보내고 있을 걸이 형에게 수락산 계곡이라도 가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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