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길어진 탓에 부모님이 가꾸시는 텃밭의 일이 고스란히 밀렸다. 맞는 날보다 틀리는 날이 더 많은 일기예보는 오늘도 온종일 비 소식을 띄웠지만, 오전에 소나기만 한두 차례 잠깐 쏟아졌을 뿐, 내내 해와 구름이 숨바꼭질하는 날씨였다. 어머니는 마음이 급했다. 일기예보를 마냥 믿기는 영 미덥지 않지만, 내일도 모레도 비가 온다고 하니 오늘 그간 쌓인 일을 해치워야 한다.
수확이 끝난 두둑의 비닐을 걷어내고 퇴비를 뿌렸다. 밭을 갈아 퇴비와 흙을 잘 섞은 후,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웠다. 습도가 높긴 했지만 해가 구름 사이로 드나들기만 할 뿐 얼굴을 비추지 않아 한여름 치고는 일하기 좋은 날이었다. 서툰 손 하나 보탰을 뿐인데, 그것도 도움이라고 일의 진척이 제법 빨랐다. 어머니는 묵히려고 했던 땅도 이참에 일구어 농작물을 심었으면 하는 눈치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배추고 무고 다 비쌀 텐데…….” 아쉬운 듯 자꾸 혼잣말하시기에 그곳도 일구기로 했다. 예기치 않은 일거리가 생긴 탓에 밭에 뿌릴 약이 모자라 읍내로 사러 나가야 했다. “딱 맞게 사 오지 말고 넉넉히 사와, 넉넉히.”
“어?”
농약사에서 이런저런 약을 사서 나오는데 누가 아는 척을 했다. 낯이 익긴 한데,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읍내를 오가다 보면 같은 사람을 몇 번이고 마주치게 되는 좁은 동네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적은 없어도 안면은 익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 사람도 그런 양반일 가능성이 컸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차에 물건을 실었다.
“맞지? B 초등학교!”
“어?”
내 고향은 소읍치고는 학생이 많아 초등학교가 세 개나 된다. 대부분은 역사가 깊고 규모가 큰 A 초등학교로 배정받고 외곽에 있는 부락은 B나 C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를 바로 짚는 걸 보면 동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명이 알어? 김명.”
“김명?”
기억 저편에서 뭔가가 튀어 올랐다.
“초등학교 때 짝이었는데…….”
“그지? 나 명이 오빠여. 너 D 중핵교 나왔지? 나도 거기 나왔어.”
이런…. 초등학교, 중학교 선배다. 어쩐지 낯이 익다 했다.
“동창회 때미 내려온 겨? 2차는 딴 데 가지 말고 우리 가게로 와. 알었지? 그럼 낼 보자.”
그는 주르륵 자기 할 말만 쏟아 내고는 휙!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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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동창회 허냐?”
“아니. 왜?”
“아까 낮에 명이 오빠 만났는데, 동창회 때문에 내려온 거냐고 묻드라고.”
“남매가 아주 애쓴다, 애써.”
저녁때 친구를 만났다.
긴 장마로 인해 산꼭대기 그의 아지트는 개점 휴업 상태다. 요즘은 동네 맛집 탐방을 하는데, 정신 나간 인간들의 정치질로 기껏 틀어막았던 팬데믹이 다시 일어날 조짐이라 오늘 밤은 그의 집이 아지트다.
동창회나 동문회 같은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아버지 직장 문제로 10년 넘게 고향을 떠나 있다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어졌고, 고등학교는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왜? 뭔일 있었냐?”
“우리 때 회장 했던 애 있잖어. 수윤이라고. 걔가 중· 고등핵교 때도 학생회장을 했었댜. 대학 댕길 때도 학생회허고. 우리는 구찮아서 동창회장 서로 안 헐라구 빼는데, 지가 하겠다는 겨.”
부모님도 고향을 떠난 지 오래고 본인도 타지에 있어서 이쪽엔 연고가 없는데도, 어느 날부터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더니, 자기가 회장을 맡겠다고 나섰다. 우리 학년 학생 수가 백 명 남짓했는데, 동창회 참석자가 오십여 명이었다. 제법 규모가 있는 모임을 몇 년 별 탈 없이 잘 꾸려갔다고 한다.
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동창회 사람들이 모 정당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입되어 있었다. ‘이렇게 개인정보 유출한 사람은 발본색원해서 다시는 모임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 동창회장은 펄펄 뛰었다. 누구의 짓인가 하나하나 되짚어 따져나가 범인을 찾아냈다. 동창회장이었다. 지방의회 의원을 꿈꿨던 그가 정당 공천을 받고자 벌인 일이었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고 자신의 행동이 들통나자 그는 말을 바꿨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친구끼리 뭐 그럴 수 있는 거 아냐?” 이 한심한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쟤 보기 싫어서 안 할란다.” 모임은 분열되었고, 그렇게 동창회는 흐지부지 끝났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명이가 연락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왜 그지 같은 새끼 하나 때문에 이렇게 데면데면 지내야 허냐. 모이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부르고 모으고 그렇게 다시 동창회가 만들어졌다.
“너도 가입혀.”
“글쎄….”
“화순이도 나온댜. 화순이 알지? 니가 고백했다가 차였잖어.”
“야! 그게 언젯적 얘긴데! 아홉 살 때여, 아홉 살!”
“오빠! 아홉 살에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1막 이러구 놀았어?”
“아니 ‘사랑했다, 사랑했다, 사랑했다.’ 2이러구 놀았어.”
열어 놓은 창으로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더위 틈으로 가을이 소식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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