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낮잠에 빠졌다. ‘이렇게 자면 이따 밤에 잠이 안 올 텐데…’ 언뜻언뜻 잠에서 깰 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일어나기엔 모처럼 찾아온 잠이 너무나 달콤했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직 오후 햇살이 나른하게 비추는 한낮.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하냐?”
친구 S다.
“자고 있었지.”
“어제 술 마셨어?”
“아니.”
“근데 왜 이 시각에 자는겨?”
“원래 주말은 집에서 뒹굴다 자라고 있는 날이야.”
S는 직장 동료 돌잔치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멀거니 창밖을 보는데, 네 생각이 나는 거야. 마침 너네 집이랑 멀지도 않고.”
“그래?”
“어. 밥 먹었냐?”
“안 먹었지.”
"……."
내 반응이 탐탁지 않았나?
“어떡하지. 그냥 집에 가야 하나…….”
뭐야. 이 소심한 놈! 네가 언제 내가 불러야 왔다고!
“이리 와. 저녁이나 먹자.”
점점 낮아지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변했다.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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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은 항상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한다. “30분쯤 도착하겠다.”라는 말에는 ‘아무리 늦어도’라는 말이 숨어있다. 대개는 10분쯤 먼저 오는데, 어떤 때는 30분 먼저 와서 약속 시각보다 20분 먼저 도착했는데도 괜히 미안할 때가 있다. 오늘도 녀석은 30분 먼저 와서 5분을 기다렸다.
“뭐 먹을래?”
“돌잔치 갔다 오는 거면 밥 먹었겠네?”
“아니 뭐…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았어. 직장 동료 돌잔치가 다 그렇지 뭐. 니는 밥 안 먹었대매.”
이런저런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해물 찜을 먹기로 했다.
“맨날 삼겹살에 소주도 이젠 지겹잖아.”
“그래. 입이 짧은 친구를 둔 덕에 네가 고생이 많다.”
해물 찜이 푸짐하게 나왔다. 막걸리가 당긴다는 S의 말에 막걸리를 주문하고 잔을 부딪는데, 녀석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야. H형도 불렀다.”
“너 또 판 키우려고 그러지?”
“아냐!”
S의 특징은 술판을 키우는 데 있다. 녀석과 술을 먹다 보면, 하나둘 사람들이 합세하고 둘 셋으로 시작했던 술자리는 어느새 판이 커져 테이블을 몇 개 이어붙인 대규모의 술자리가 될 때가 많다. 녀석과 나는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어느 날엔 심지어 총회보다 많은 사람이 참석해서 총회를 갈음하여 의견을 수렴한 경우도 있다. 제 버릇 어디 갈까.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슬쩍슬쩍 사람이 늘어나고 그 늘어난 사람만큼 술자리가 커지고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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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서 나왔다. 담배를 피우는 몇몇은 한쪽에서 구름과자를 먹었고, 늦게 와서 술을 얼마 먹지 못한 몇몇은 2차를 가자고 사람들을 규합했고, 집에 갈 몇몇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앞쪽에서 일행 중 누군가가 넘어졌다. 2차를 가자고 했던 선배다.
“형! 괜찮아요?”
뛰어가서 선배를 일으키는데, 옆에서 시커먼 물체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어?”하는 사이에 시커먼 물체가 나를 덮쳤고 그대로 선배의 머리에 눈을 “쾅!”하고 부딪쳤다. 다행히 선배는 뒤에서 부축하려던 후배 품으로 쓰러져서 머리를 다치지 않았고, 뒤에 있던 후배도 엉덩방아를 찧었을 뿐 이상이 없었다. 나를 덮쳤던 시커먼 것의 정체는 후배였다. 차가 가까이 오는데 피하지 않고 이야기하느라 정신없는 후배를 친구가 잡아당겼고 그 녀석이 느닷없이 나를 덮쳐서 이런 사달이 벌어진 거였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기분 좋게 술 먹고 다치는 것만큼 억울한 일은 없다.
다만……. 나는 오른쪽 눈에 예기치 않은 색조화장을 하게 되었다. 다채로운 울긋불긋한 색상이라 개성 있고 참 좋다. 양쪽 눈 크기도 달라져 훨씬 개성 있는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