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우유 사는 걸 깜빡했다. 어쩐지 뭐 하나 빼먹은 거 같아 영 찝찝하더라니……. 이런 건 물건 살 때는 떠오르지 않다가 꼭 집에 와야 생각난다. 매서운 추위에 어제 내린 눈이 바닥에 얼어붙었다. 우유를 사러 가는 길은 혹한의 바람에 맞서 빙판길을 걸어야 하는 대장정. 집 앞 슈퍼까지의 머나먼 길, 밀크 로드의 첫걸음은 외투와 마스크로 무장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심히 귀찮은 일이다.
편의점 앞에 사람들이 오글오글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대로 꺾어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고민의 순간 길 건너편의 누군가가 나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편의점 알바생이다. 일전에 가게 앞 구석진 곳에서 구름과자를 먹는 녀석에게 ‘어차피 해로운 거 먹을 거면, 비싼 걸로 먹으라.’고, 선물 받았던 아이코스를 준 적이 있다. 이후 그는 나를 보면 고개를 꾸벅 숙여 아는 체를 한다. 이미 눈이 마주쳤으니 다른 곳으로 가기는 늦었다.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고 있는 남자를 카메라 세 대가 둘러싸고 있었다. 카메라마다 두세 명의 사람이 달라붙었는데,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뿔테 안경을 낀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메소드 연기를 하란 말야! 메소드!”
공중전화는 가게 옆 야외용 테이블이 놓인 곳에 있어서 인파를 뚫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다행이다. 우유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밖에 영화 찍나 봐요?”
“뭐 어디 연영과 학생들이래요. 사장님한테 허락받았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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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 우리는 대동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일을 하나씩 풀어나가다 보면 해가 지고 날이 깜깜해지기 일쑤였다. 동아리 회장은 Bob이었는데, 그는 학생회 임원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Bob은 뭔가 색다르고 기억에 남을 이벤트를 만들고자 했지만, 선후배들의 심드렁한 반응에 힘들어했다. 달빛이 가로등 불빛만큼 환하던 밤, 총학회장을 꿈꾸는 야심가와 이팝나무 아래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찬샘아. 니는 왜 애들한테 듣기 좋은 말만 하냐. 싫은 소리는 맨날 나만 해서 애들이 나 싫어하잖아.”
“뭔 개똥 같은 소리여.”
“아니, 내가 모이자고 하면 다들 핑계 대고 빠지잖아. 니가 연락하면 재깍재깍 오고.”
그렇지 않다. 나는 후배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서로 화제에 올릴만한 이야기가 없고 동방에서 마주치면 그저 ‘밥 먹었냐.’는 인사가 다였다. Bob은 다이어리에 후배들 수강과목까지 기록해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겼다.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생일까지 챙겨주는 선배를 싫어할 리가…….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그랬냐. 카리스마를 키우라 했어, 안 했어?”
“카리스마?”
“그려. 인마! 회장이 카리스마가 있어야 회원들이 따를 거 아녀.”
그날 이후, Bob은 한동안 당대 최고의 터프가이, 카리스마의 화신! 최민수 코스프레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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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한답시고 대학로를 얼쩡거리던 시절, 극을 쓰고 무대에 올릴 준비를 하며 가장 많이 내뱉었던 단어가 ‘메소드’와 ‘카리스마’였다. 지금도 가늠하기 어려운 그 말을 왜 그렇게 쉽게 했을까. 오늘도 곱게 자기는 글렀다. 이불을 적어도 백 번은 차야 잠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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