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에게는 오래전 이혼하고 지금껏 홀로 지내는 누나가 하나 있다. 그는 학창 시절 야구선수였는데, 부모님의 경제력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누나도 동생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한동안 방황하던 누나가 뒤늦게 대학에 가고 자격증을 따고 취업을 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그에게 누나는 누구보다 존경하고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누나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누나가 사귀는 사람을 처음 본 날, K는 마음이 심란했다. “형! 보고 싶어요!” 그는 마이크에게 전화해서 ‘오늘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내게 전화해서 ‘지금 보고 싶다.’고 떼를 썼다. 봄기운이 가득해서 바람마저 포근한 평일 밤이었다.
“형! A고등학교가 명문고에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왜?”
“야. 우리 때는 다 뺑뺑이였어. 명문고는 무슨….”
“그래요? 형들 고향이 충청도잖아요. 그런데도 몰라요?”
“인마! 난 서울이여!! 서울 토박이라고!”
마이크가 발끈했다.
“근데 형은 왜 충청도 사투리 써요?”
“내가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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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충북은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와 맞닿아 있어 지역색이 옅다. 사투리도 기본 호서지방 사투리에 경기, 영서, 영남, 호남 방언이 섞여서 타지역으로 이주하면 그 지방 말투에 쉽게 동화되는 편이다. 전국 각지로 흩어졌던 친구들이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오는 명절날, 친구들과 만나 왁자지껄 떠들다 보면 각자 제 살다 온 동네 방언을 쏟아내는 통에 여기가 고향인지 객지의 어느 곳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온 지 20여 년. 이젠 고향에서 보낸 시간보다 객지 생활을 한 시간이 더 길다. 사투리는 다 잊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누군가가 ‘당신 충청도 사투리 써요.’라고 내 말투를 짚어주면 한 번씩 고향 방언에 대해 상기하게 된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서 자리를 잡은 마이크는 대체 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지, 그 녀석은 이 모든 원인을 내 탓으로 돌리는데, 나는 과연 지금도 충청도 사투리를 쓰고 있는지, 마이크의 아내인 하루까 상의 어설픈 충청도 사투리는 누구에게 배운 것인지…….
마이크는 자신이 서울 토박이임을 강조했고, 나는 그에 동조했다.
“야가 뭔 사투리를 쓴다고 그랴. 딱! 서울말이고만.”
“맞어! 지느~으~은! 억양이 딱 경상도믄서 어서 지적질이여!”
K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행님! 내가 은제!”
열어놓은 창으로 봄바람이 슉슉 들어왔다. 멀리 떠 있는 달이 구름을 몸에 두르고 우리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