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광양에 계실 때, 여름휴가는 항상 아버지 생신 즈음에 썼다. 서울과 남쪽 끝의 항구도시 간의 거리가 꽤 멀어 오가기 만만찮았고, 내려가면 최대한 오래 머물고 싶었다. 아버지 생신이 음력 6월이어서 휴가를 쓰기도 좋았다.
서른 중반 무렵의 여름이었다. 금요일 밤, 아버지 생신을 축하하러 우르르 내려온 동생네 가족이 일요일 오전 일찌감치 청주로 떠나고, 부모님이 동네 지인들과 점심 식사하러 나가신 사이 청소를 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탈수 끝났다는 세탁기 멜로디에 빨래를 끄집어내서 베란다 건조대에 탁탁 털어 널었다. 이제 한숨 쉬어야겠다. 주말 내내 조카들에게 시달렸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거실에 누워 책을 보는데, 외출하셨던 부모님이 돌아왔다.
“얘! 너 현주가 여자 소개해 준댄다.”
“네?”
“공무원인데 너무 참해서 남 주기 아깝대.”
울산에 사는 이종사촌 누나가 선 자리를 알아봐 준 모양이다.
“어…, 왜요?”
“잔말 말고 그냥 봐! 알었어?”
약주 한잔에 얼굴이 불콰하게 물든 아버지가 내 말을 막았다. 그 무렵의 나는 소개팅이나 선이 들어오면 대부분 거절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회사 일은 바빴고, 하고 싶은 일은 많았다. 부모님이 ‘만나는 사람 있냐.’고 넌지시 물으실 때마다 ‘곧 생기겠죠.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기회 자체를 만들지 않으니 인연이 생길 리 만무했다. 부모님도 내 상황을 어렴풋이 눈치채신 것 같다. 아버지는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당장 보는 겨! 알었지?” 선을 보라고 닦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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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문자와 두 번의 전화를 주고받은 후 약속을 잡았다. 아가씨는 서울에서 울산까지 내려오라고 하기 미안하다고 대구에서 만나자고 했다.
“부산은 어때요?”
“부산은 더 멀잖아요. 그냥 대구에서 만나요.”
충청도 촌놈에게 대구나 부산이나 낯설긴 매한가지다. 오히려 친구 도비가 부산에 있어서 심리적 거리는 부산이 더 가까웠는데, 아가씨는 단호했다. 하지만 나는 눈치 있는 사나이! ‘저녁때 부산에 있는 친구 만나서 한잔하려고요.’ 따위의 생각은 꿀꺽 삼키고, “네. 그러죠.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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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동대구까지 두시간이 채 안 걸렸다. 아가씨가 차를 갖고 마중 나와준 덕에 대구 시내까지 편하게 이동했다.
“아침 드셨어요?”
“네. 정인 씨는요?”
“저도 먹었어요. 식사하기는 이르고…, 그럼 먼저 커피 어때요?”
“좋죠.”
주말이라 그런지 카페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커피를 주문하고 진동벨을 받아 나오자 안쪽에서 아가씨가 손을 흔들었다. 앉을 자리가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용케도 빈자리를 찾았다. 첫 만남인데 손발이 척척 맞는다.
음료를 두고 마주 앉았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아가씨의 커피는 휘핑크림을 얹은 카페모카다.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창밖의 사람들은 손 그늘을 만들어 햇살을 가리거나 작은 부채를 흔들며 땀을 식혔다. 짝! 아가씨가 손뼉을 쳤다.
“자, 이제 우리 이야기합시다. 날씨나 취미 같은 잡다한 이야기 말고 진짜 이야기요. 찬샘 씨도 이런 자리 처음은 아니잖아요. 우리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핵심부터 까죠.”
“핵심이요?”
“네. 음…, 저는 아파트 하나 있어요. 24평이고요, 빚은 은행 대출 3천 있는데, 내년에 적금 만기니까 그걸로 갚으면 돼요. 찬샘 씨는요?”
아! 서로 경제 상황을 이야기하자는 거였나?
“뭐 그렇잖아요. 괜한 시간 낭비할 필요 있어요? 서로 원하는 조건이 안 맞으면 아예 시작을 안 하는 게 낫지요. 그리고 저는 지금껏 쌓아온 커리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찬샘 씨가 이쪽으로 직장을 옮기거나 주말부부를 해야 할 거예요.”
재미있는 사람이다. ‘거절을 이렇게 표현하는 건가?’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도 눈을 빛내며 듣다가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묻는 것을 보면 그건 아닌 듯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나와는 맞지 않았다. 결론이 금세 나왔다.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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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봐. 된 겨, 안 된 겨?”
‘부산에 놀러 가겠다.’는 내 말에 ‘그렇다면 아침부터 깨끗이 씻고 꽃단장하겠다.’는 흉악한 대답을 했던 도비는 만나자마자 결과부터 물었다.
“너 내가 경상도 억양으로 충청도 사투리 쓰지 말라 했냐, 안 했냐.”
“대따! 됐나, 안 됐나!”
“나랑 안 맞더라고.”
“하이고! 니 은제 사람 될래! 함 만나 딱 맞는 사람이 어딨노!”
그는 이번에도 나를 돼지국밥 집으로 데려갔다.
“야! 나 돼지국밥 안 좋아한다고!”
“여가 50년 전통의 맛집이란다. 내 묵어봤는데, 아주 기가 맥히다. 니는 오늘 신세계를 경험할 끼야.”
입구에서 멈칫 걸음을 멈추는 내 팔을 끌며 친구는 큰소리를 쳤다.
“어매요! 여기 국밥 두 개 하고, 소주 하나 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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