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는 주말 내내 해님이 방긋 웃고 있는 그림이었지만, 청주에 내려가는 동안 소나기를 몇 차례 맞았다. 곧 있으면 동생 생일이어서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때마침 부모님이 청주에 있는 병원에 가는 날이라 겸사겸사 모이기 좋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해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오빵! 어디야?”
“주차장. 짐이 좀 많은데, 내려올래?”
“아이공. 일찍 왔넹? 나 아직 퇴근 못해쏘. 2호 학원 끝나고 집에 왔대. 같이 놀고 이쏘.”
부모님은 진료 끝나면 병원에서 기다리다가 동생을 태워서 오겠다고 하셨다. 짐을 일단 아파트 현관문까지 옮겼다. 끌차가 있으면 좋을 텐데, 어디 빌릴 곳이 없으니 서너 번 왕복하며 짐을 날라야 했다. 날이 습해서 그런지 금세 땀이 났다. 초인종을 누르고 렌즈에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꺄!!”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삼춘!!!” 2호가 덥썩 안겨왔다.
“삼춘!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응? 엄마, 아빠보다 빨리 왔잖아. 삼촌이 일 등으로 온 거 아냐?”
2호를 내려놓고 짐을 안으로 들여놨다. 고기는 아이스박스에 꼼꼼하게 포장을 해서 따로 정리할 필요가 없지만, 채소와 과일은 씻어야 하고 맥주는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셔츠 소매를 걷고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놓은 박스를 풀었다. “삼추운~” 2호가 바지를 잡아당겼다.
“응? 왜?”
“나랑 잠깐 어디 좀 가요.”
“어디?”
“꼭 갈 데가 있어요.”
“내일 가면 안될까? 삼촌 오늘 2호네서 자고 갈 거야.”
“안 돼요! 지금 가야 해요!!”
“그럼 일단 이거 정리 먼저 하고, 그다음에 가자. 알았지?”
“내가 도와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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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가 가자고 한 곳은 대형마트였다. 원하는 장난감이 있는데 제 엄마가 사주지 않으면, 2호는 나를 꼬드겨 대형 마트에 갔다. “그냥 구경만 하려고요.” 애타는 눈길로 장난감을 바라보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서 ‘엄마, 아빠 말 잘 듣기’를 약속으로 걸고 사주는데, 오늘은 장난감 코너를 지나쳐 화장품 코너에서 얼쩡거렸다.
“왜? 뭐가 필요한데. 이야기해봐.”
“삼춘. 나 핸드크림 하나만 사주면 안되요?”
“되지.”
핸드크림을 살펴보는데, 누가 뒤에서 말을 붙였다.
“저…, 혹시…, 찬샘 씨 아니세요?”
“네?”
오래전 기억 속의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내려 앉긴 했지만, 단발머리, 둥근 얼굴, 금테 안경, 렌즈 너머 반짝이는 눈…, 단박에 알아봤다. 첫사랑이었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 은희경의 『새의 선물』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났다.
“쑤!”
‘쑤’는 내가 그녀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덜컥 말을 내뱉고 아차 싶었다.
“하하하. 그 이름 무지 오랜만에 듣네. 아들이야? 똘똘하게 생긴 게 너랑 완전 똑같아.”
“안녕하세요.”
2호가 배꼽 인사를 했다.
“조카야.”
“아하! 희아 아들이구나! 그 새초롬하던 여고생이 아이 엄마가 되고…, 와! 시간 빠르다.”
“여기 살아?”
“아니. 취재 때문에 왔는데, 혀니가 내려온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야.”
혀니는 그녀의 중학교 동창이자 베프고 내 야학 후배다. 연애 시절 같이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랬었다. 마치 어제 일처럼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름은 마법의 주문이다.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해보긴 했지만, 이렇게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시간에 만날 줄은 몰랐다. “명함 한 장 줘.” 짐 정리하고 휴대폰만 들고나온 터라 지갑을 챙기지 못했다.
“미안. 지갑을 집에 두고 왔어.”
“여전하구나. 넌 하나도 안 변한 거 같아. 싫다는 말을 못하고 돌려서 표현하는 것까지 그대로야.”
그렇지 않다. 정말 두고 왔다. 어버버하다 이야기도 제대로 못 했다. 그렇게 다시 이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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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동생의 생일은 성대했다. 매제가 삼단 케익을 사 왔고, 1호가 꽃을 샀다. 동생은 부모님이 사준 꼬까옷을 입고 고깔모자를 썼다. 테이블은 어머니가 만들어온 음식만 차렸는데도 가득 차서 틈이 없었다.
선물 증정 시간, 2호가 손 편지와 선물을 건넸다. 마트에서 산 핸드크림을 색종이로 곱게 포장했다. “엄마! 얘 돈 딴 데 다 쓰고 삼춘한테 사 달랜 거야!” 1호의 폭로에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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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끝자락, 서울 가는 길은 정체와 서행을 반복했다. 다시 소나기가 쏟아졌다. 창밖은 온통 초록! 초록! 초록이다. 이제 여름이구나. 오탁번 시인의 ‘실비’를 흥얼거렸다.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
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쥐눈이콩만 한 어린 수박이
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
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
알랑알랑 잎사귀를 흔든다
내 마음의 금반지 하나
금빛 솔잎에 이냥 걸어두고
고추씨만 한 그대의 사랑 너무 매워서
낮곁 내내 손톱여물이나 써는 동안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재채기라도 하셨나
실비 뿌리다가 이내 그친다
- 오탁번, 『눈 내리는 마을』, 시인생각, 2013, p.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