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엔 여름인 듯 제법 덥더니 오후 들어 서늘한 바람이 불다가 저녁 무렵엔 빗방울이 떨어졌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내일 오후쯤에나 쏟아지는 빗줄기와 이별을 할 것이다. 도로는 어느새 비옷을 입어 가로등 불빛에 번들거렸다. 거리 곳곳에 생긴 얕고 작은 웅덩이에는 길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이 비쳤다. 빗방울이 바지에 튀지 않게 조심스레 걸어 집으로 향했다.
친구 ‘밥’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퇴근이 나보다 늦은 녀석은 우리 동네로 건너온다고 한다.
집에 들어와 씻고 나왔을 때는 19시 20분. 배가 고팠다. ‘뭘 좀 먹을까?’ 그럴 수는 없다. 저녁 메뉴를 상상하며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친구를 두고 먼저 먹을 수야 없지.
물을 끓여 티포트에 붓고 녹차를 우려내 마시며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서관이라 다수의 책이 비치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신청하면 바로 반영되는 편이고 내가 찾는 책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아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다. 책방에서 갓 사온 책을 펼치는 느낌.
“나 도착했어. 주차하고 있을게.”
만나면 항상 먼저 나오는 말은 “뭐 먹을까?” ‘밥’은 오면서 서너 가지로 압축한 ‘오늘의 메뉴’를 줄줄 읊었다. 오늘은 모듬전에 막걸리 혹은 해물찜. 둘 중 하나다. 녀석은 해물찜 보다 모듬전에 막걸리가 생각나는 눈치다.
“파전에 막걸리로 하자.”
“그치? 비 오는 날엔 부치기에 막걸리지!”
월요일 임에도 막걸리 집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몇 군데를 돌다 ‘신장개업’ 화환이 아직 가게 앞을 장식하고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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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이 형네도 불렀다.”
“잘했어. 온대?”
“어. 형수는 어머니 병원에 갔다가 오느라 좀 늦는 댔고, 걸이 형은 퇴근하고 바로 온댔어.”
모듬전을 시켰는데, 주문이 밀려서 그런지 막걸리를 꽤 비운 후에야 안주가 나왔다.
곧 걸이 형이 도착했고 연이어 형수가 가게로 들어왔다.
“밥! 내일 출근 안 해?”
“네. 내일 쉬어요.”
“내 그럴 줄 알았지.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 우린 내일 출근한다고.”
“아니 뭐 대한민국 직장인이 평일이라고 술 안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오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술을 많이 마시라 다그친 것도 아니고…….”
밥의 직장은 격주로 토요일 근무를 하는데, 그런 주는 주중에 하루를 쉰다.
“주말에 보자고. 금요일이나 토요일! 얼마나 좋아. 걱정도 없고.”
“주말엔 나도 바빠요. 좋다고 달려올 땐 언제고 왜 오자마자 투덜대고 그래요.”
“야야. 밖에 봐봐. 비 오잖아.”
“아!”
“뭐야! 왜 그렇게 쉽게 수긍하는데?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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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흘러 연애 이야기가 나왔다.
“밥은 이제 연애 안 해?”
“여자라도 소개해주고 말을 해요.”
“뭐 우리가 소개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더만.”
형수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근데 밥은 왜 연애를 길게 못해?”
“사귀다보면 지겨울 수도 있고 권태기도 오고 그러다보면 헤어지고 그러는 거죠.”
“그래? 근데 권태기가 빨리 온다? 연애 기간이 한 달을 못 넘잖아.”
“아니거든요! 두 달 간적도 있어!”
우린 녀석의 연애 상황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카톡 프로필에 연애 현황을 남기기 때문. 예컨대 연애를 시작하면 일단 프로필이 ‘너의 의미’ 악보로 바뀐다. 그리고 프로필 사진이 자주 바뀌는데 커플 티, 놀러 가서 같이 찍은 사진(여자 친구는 잘라내고 자신만 나오게 편집했다.), 사랑에 관한 문구 등 달달한 느낌으로 가득 찬 사진으로 도배가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카톡 프로필이 정치 관련 사진으로 바뀌고 하루에 수차례 애니팡 하트가 날아온다면……, 100%다. 실연의 확률이.
“언제? 응? 우리는 너의 연애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어!”
철 모르고 찾아 왔던 때 이른 더위는 봄비에 녹아 어디론가 스며들었고, 그 틈으로 부는 바람은 제법 서늘해서 막걸리 맛을 돋우었다. 장황하게 자신의 불타는 연애에 대해 변명을 하던 밥의 목소리가 와글대는 술집 소음에 섞여 리듬처럼 장단을 맞춰 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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