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가 내렸다. 대풍(大豊)의 예감이 들었다. 올해는 유난히 날이 좋았다. 작물에 마침맞은 볕이 들었고, 가물다 싶으면 여지없이 비가 내렸다. ‘이 질루만 쭉 가면 대풍인데….’ 느티나무 아래에서 비가 긋기를 기다리다 외할아버지는 고개를 회회 내저었다. 아니다, 풍년의 ‘ㅍ’도 생각하지 말자. 부정 탄다.
비가 제법 길어져 논의 물꼬를 살피고 일찍 집으로 향했다. 옷은 젖고 질척해진 땅이 걸음을 부여잡았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이 언덕만 넘으면 집까지는 지척이다. 마을회관을 지나자 저만치 집이 보였다. 사람들이 대문 앞에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뭔 일이랴.’ 외할아버지는 다리를 재게 놀렸다.
“왜 그랴.”
대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외할머니가 황급히 뛰어왔다.
“장꽝에 가봐유. 난리났슈.”
우지끈! 쾅! 쨍그랑!
무엇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대문을 열자 세찬 바람이 쏟아졌다. “뭐여!” 우물을 돌아 장독대로 뛰어갔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윙윙 울었다. “어랍쇼?” 장독대는 멀쩡했다. 후두둑후두둑. 굵은 빗방울이 항아리를 두드릴 뿐이었다. ‘대관절 뭐가 뿌서진 겨.’ 집 곳곳을 살폈지만, 망가진 곳 하나 없었다.
와장창!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다! 진원지는 분명히 장독대였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 보았던 그대로, 늘 있던 그대로 크고 작은 항아리가 마당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항아리를 두드리던 빗방울이 뚜껑에 고여 손바닥만 한 웅덩이를 만들었고, 다시금 그 위로 내려앉으며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물 위로 언뜻 누군가의 얼굴이 퍼졌다. 일전에 만난 도깨비의 말이 귀를 울렸다.
“여기 염병할 놈이 하나 들어앉았는데……, 이걸루 슬슬 쓸어줘유.”
사랑방으로 뛰어가 도깨비가 준 빗자루를 꺼냈다. 받을 때는 나뭇가지였는데, 어느 순간 몽당빗자루로 바뀌어서 사랑에 두고 가끔 토방이나 쓸었었다. 쨍그랑. 또다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걸 그냥 때려 부숴?’ 속에서 욱! 하고 치솟아 오르는 화를 애써 눌렀다. 밑져야 본전이다. 일단 도깨비 처방대로 해보자.
촘촘한 비구름으로 어둑어둑하던 마당이 저녁이 되자 금세 캄캄해졌다. 더는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밖에서 웅성대던 사람들이 장독대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워디가 절딴난 겨?”
“뭐시가 그랬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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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아직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방문을 열자 처마 밑으로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방울이 보였다.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길다. 논의 물꼬가 걱정되어 얼른 뜨락으로 내려섰다. 괭이를 어깨에 걸치고 대문을 열었다. 문 옆에 쭈그리고 앉았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왜 이제 나와유!”
“깜짝이야! 누구유?”
“하~! 씨이! 한참 지달렸잖아유!”
사내가 봇짐을 휙 던졌다. ‘이걸루 슬슬 쓸어줘유.’ 낯익은 음성이 귀를 스쳤다. 맞다, 항아리!
“잠깐만 있어봐유!”
쏜살같이 멀어지던 사내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몸을 돌린 사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든 달아날 준비를 하는 낯선 고양이처럼 사내는 주춤주춤 다가왔다.
“왜유? 모질러유?”
“아니, 항아리 말유. 어떻게 된 건지 설명좀 해봐유.”
“아항!”
무슨 말이 떨어질까, 초조한 표정을 짓던 사내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거 내가 말했잖아유. 염병할 놈이 들어앉았다구.”
“그니까 그게 뭐냐구유.”
“그것두 몰러유?”
의기양양 사내는 잔뜩 재며 으스댔다.
새로 들여온 항아리는 원래 소이로 시집간 처녀가 친정에서 가져간 항아리였다. 부뚜막에서 놀던 어린 도깨비가 항아리에 숨었다가 깜빡 잠이 들어 소이까지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 집 뒤꼍을 관장하는 천룡신이 허락도 없이 숨어든 도깨비가 괘씸해 항아리에 가둬버렸다고 한다. 난데없이 낯선 동네, 낯선 집에 떨어진 것도 황당한데 항아리에 갇혀 벗어날 수 없으니 심술이 잔뜩 난 어린 도깨비가 횡포를 부렸던 것.
“어린 눔이 뭣도 모르고 지랄하는 건데, 걷다 대구 맞장구 치면 되겄슈? 잘 달개야지.”
그 어린 도깨비는 거듭되는 빗자루질에 진정하고 원래 살던 동네로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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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짐을 풀었다. 돌돌 말아 실로 묶은 지폐, 복주머니에 가득 담긴 동전, 담배 서너 쌈…. 외할아버지는 이마를 짚었다.
“아, 왜 자꾸 갖구 오는 겨. 빌린 돈 접때 다 갚었슈. 이건 갖구 가유.”
“하! 이 양반두 참…, 나이두 어린데 벌써 노망이 들었나. 그건 접때구, 이건 요번에 빌린 거 아니유.”
사내는 봇짐을 떠넘기다시피 안기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허…, 참….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아차! 쏟아지는 빗줄기에 마음이 급해 쌈지를 챙기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 쌈지를 꺼내 툇마루에 앉았다.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 스읍 한 모금 깊이 빨았다.
“뭐유! 왜 여기서 이러구 있슈!”
눈을 떠보니 툇마루 기둥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쨍한 햇볕에 눈이 따가웠다. 외할머니가 혀를 쯧쯧 찼다.
“여서 이러지 말구 방에 가서 자유.”
“아녀. 논에 가봐야지.”
“가긴 뭘 가유. 밥 금방하니께 자시구 가유. 봉당 좀 쓸게 부엌에 가서 빗자루나 갖구 와유.”
분명히 어제 쓰고 이 자리에 두었는데, 빗자루가 사라졌다.
해가 벌써 뜨락으로 몸을 드리웠다. 일하러 갈 시간이다. 마음은 급한데, 빗자루가 영 보이지 않았다.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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