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소주를 주로 마셨습니다. 술을 대학 와서 배웠는데, 그 무렵이 IMF 여파로 국가 경제가 휘청이던 시기라 맥주는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지요. 가끔 알바비를 과하게 받으면 친구들을 불러 OB 캠프에서 호기롭게 생맥주 5,000cc를 시키기도 했지만, 간만에 고급술이라고 다들 미친 듯이 퍼붓는 통에 맛을 느낄 틈도 없었네요.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갈 때는 캪틴큐를 삼다수 병에 담아 갔습니다. 아시지요? 다음날 숙취가 없는 술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다음날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99년 초여름이었습니다. 이번 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가기로 결심한 터라 시간은 널널하고 돈은 없고 마음은 허했습니다. 총을 사가라느니, 치약 뚜껑에 머리를 박아봤냐느니 킬킬대며 놀리는 선배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동아리방에 있는 컴퓨터로 PC통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우누리 우스개 게시판, 동호회 게시판을 훑고 있는데, 쪽지가 왔습니다. ‘뭐 하세요?’ 며칠 전 끝말잇기 채팅방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이상하게 말이 통해서 따로 한참 이야기를 하다 시간 나면 술 먹기로 했었지요.


 

Pan0211(찬샘) : 동아리방에서 죽치고 있어요. 오늘 합평이 있거든요. .,

Sisready(한별) : 몇 시에 끝나요?

Pan0211(찬샘) : 글쎄요. 6시 시작인데, 제시간에 오는 인간들이 없어서리.

Sisready(한별) : 그럼 오늘 번개 힘들겠네요?

Pan0211(찬샘) : 그게아무래도쪼금... ^^a

Sisready(한별) : 오늘 알바비 받아서 술 쏘려고 했는데걍 친구들하고 마셔야겠다. -_-

Pan0211(찬샘) : 헉!! 어디로 갈까요? 말씀만 하시죠. 제가 분수도 모르고 바쁜 척을헤헤. ^^;;;

Sisready(한별) : 혜화로 오실래요?



. 어디 가요?” 컴퓨터를 끄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저를 멀뚱히 바라보던 후배가 물었습니다.

이유식값 인상으로 서울 시내 유치원생들이 데모해서 지하철이 밀린다네. 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 학교 앞에서 자취하잖아요.”

그러니까. 원래 가까이 사는 사람이 늘 지각하는 법이거든.”

 

학생회관 계단을 부지런히 내려가다 선배와 마주쳤습니다.

 

어디 가냐?”

찬우물 형 여자 만나러 간대요!”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후배입니다.

 

? 그럼 나도 가야지!”

 

공돌이, 예술학도, 그리고 먹고 대학생다과적 연합생(多科的 聯合生) 셋이 학관을 나섰습니다.

 


--- ** --- ** ---


 

답장 왔냐?”

 

학관 1층에서 삐삐를 쳤습니다. 떨거지 두 명이 따라붙었는데, 데리고 가도 되냐고 음성을 남겼지요.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정문까지 걸어갔습니다. 주머니에서 삐삐를 꺼냈습니다.

 

왔어요.”

몇 번이야?”

“1번이요.”

오케이! 가자!!”

 

데리고 가도 되면 1번을 찍어 달라고 했어요. 대신 2차는 우리가 산다고 했지요.

 

. 근데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PC통신에서 채팅하다가 함 보자고 했어요.”

오호! PC 통신? 내가 또 그쪽엔 일가견이 있지. 케텔 유저였거든.”

케텔이요? 그게 뭐예요?”

 

쏟아지는 과제를 해결하느라, 며칠 밤샘을 한 후배의 눈에서 어느새 졸음기가 사라졌습니다.

 

하이텔 전신이야. 통신에서 사람들을 지칭할 때, ~님 하는 게 그 시절 만들어진 거야.”

!! 형 얼리어답터였어요? 쫌 멋진데요.”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야?”

형은 그냥 방망이 깎는 노인 같았죠.”

노가다라는 거냐?”

형네 과는 왠지 그런 이미지가 있잖아요. 축구할때 각목 들고 응원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혜화에 도착했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환승하고 제법 먼 길이었지만,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 친구와 가는 것이라는 말처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목적지가 성큼 다가와 있었습니다.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서 육교를 건너 지하에 위치한 민속주점 을 찾기까지 한참을 헤매야 했습니다. 우리가 길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날이었지요. 물어물어 인파를 헤치고 겨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8시가 다 된 시각이었습니다. 주점 앞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어떤 아가씨가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혹시시스레디 님?”

 

아가씨가 책을 내리고 우리 셋을 바라보고는 씩 웃었습니다.

 

. 판 님이시죠?”

 

우우~~~

오토바이가 휙! 스쳐 지나는데, 머리 색깔이 환하게 빛났다가 가라앉았습니다. 빛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얼굴에 휴지는 일부러 붙이신 거예요?”

 

여행용 티슈를 산다는 걸, 엠보싱 운운하며 두 겹으로 된 두루마리 화장지를 강력하게 추천한 후배가 원망스러웠습니다. 1999. 여름이 오는 길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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