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면 고종사촌 형제들과 어울려 놀았다. 서울 사는 고모네 식구가 모두 시골로 내려올 때도 있었고 내가 서울로 올라갈 때도 있었다. 고모는 아파트에 살았는데, 덕분에 난 말로만 듣던 엘리베이터도 타보았고 수세식 변기 물 내리는 법도 알게 되었다.
어느 여름이었다.
고종사촌 형제들과 오후 내내 밖에서 놀다 해거름에 집에 들어왔는데 고모 표정이 이상했다.
"찬샘아! 너 이리 와봐."
방으로 끌려들어 갔다.
"솔직하게 말해. 너 고모한테 잘못한 거 있지?"
"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고종사촌 형제들 두유 먹을 때 한 모금 나눠 먹은 것? 뽑기 해서 나온 얌체공을 달라고 했을 때 안 준 것?
“빨리 말 안해?!”
서릿발 같은 다그침에 그날 했던 내 행동 모두가 잘못한 것 같았다.
"너 고모 지갑 가져갔어, 안 가져갔어."
"안 가져갔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줄 게. 가져갔어, 안 가져갔어?"
"안 가져갔어요."
철썩!
눈에 불꽃이 튀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찬샘아. 고모가 말했잖아.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해 준다고."
갑자기 고모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졌다.
"지갑이요?"
"그래. 고모 지갑."
"안 가져갔어요."
철썩! 철썩!
"얘가, 얘가 안 되겠어. 응? 빨리 사실대로 말 안 해?"
난 고모 지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고모 손이 서너 차례 더 올라왔다. 정신이 없고 어지러웠다. 가져갔다고 하면 안 때리려나. 엄마가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날, 뺨을 후려치는 고모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지갑을 가져갔다는 거짓말을 했고, 구둣주걱으로 미친 듯이 맞았고, 고모 손에 이끌려 놀았던 곳을 모두 돌아야 했다.
입 안쪽이 터져서 한동안 침을 삼킬 때마다 찝찝한 맛이 났다. 흉터라는 게 입안에도 남을 수 있는지, 지금도 혀로 그쪽을 건드려보면 흔적이 남아있다.
--- ** --- ** ---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일이 어쩌다 떠오르면, 궁금해진다.
지갑을 누가 가져갔을까? 고모는 지갑을 찾았을까? 만약 다른 데 두었다가 깜빡 잊은 거였다면 나한테 미안하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