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집안 일을 하고 나니 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목이 칼칼해서 물을 끓여 찻주전자에 붓고 차를 한 잔 따랐다. 맑은 연녹색의 녹차가 쪼로록 소리와 함께 컵에 담겼다.
그동안 사놓고 읽지 못했던 책중에 하나를 빼들었다. 「중국의 거대한 기차」. 흥미롭게 봤던 차마고도의 '마지막 마방' 편과 이어지는 것 같아 구입했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안된다. 아차 하는 순간에 짙은 새벽빛으로 물든 창을 맞이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두어 페이지쯤 읽었을때 휴대폰이 울렸다. 시각은 11시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걸 받어 말어?'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5초쯤 흘렀나?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형!"
약간 들뜬 목소리가 왁자지껄한 소음과 섞여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형. 지금 어디에요?"
"집이지. 지금 시간이 몇신데."
"형……!"
"말해."
"제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또 시작이다.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회귀본능이 후배에게는 없다. 그래서 녀석은 술에 취하면 가끔 길을 잃는다.
"휴대폰에 네비 찍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서 택시 타."
"그냥 형이 이쪽으로 와주시면 안돼요?"
후배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나왔다.
에효~
--- ** --- ** ---
"형! 우리 따악~ 한 잔만 더해요!"
녀석은 나를 보자 배시시 웃었다.
"지금도 많이 마신것 같은데. 오늘은 이쯤하지? 내일 출근 안해?"
"그래도 형! 우리 만난지 백만 년도 넘은 것 같은데요? 전화도 잘 안 받고 문자 해도 답장도 잘 안 하고……."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넌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냐!!
후배와 근처 술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혼자 갈수 있다고 떼를 쓰는 녀석을 집 근처까지 '모셔다 드리고' 걸어 나오는데, 한참 날리던 눈발이 잦아 들었다.
돌아보니 잠시 눈이 그쳤다.
저 멀리 후배의 뒷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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