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아. 너 포비 알지? 너 본다니께 지도 같이 보자는데?”
“포비 이사갔잖어.”
“얼마 전에 일루 다시 왔댜.”
“그려? 그럼 같이 보지 뭐.”
포비는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중학교 동창의 별명이다. 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겼다가 군대에서 다시 만났다. 사단 훈련소를 마치고 연대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인사장교와 함께 나를 데리러 왔던 사람이 포비였다.
자동차 정비 업체에서 일하다 군대에 온 그는 손재주가 좋아 대대장의 총애를 받았다. 자대 배치받은 곳이 외따로 떨어진 독립대대여서 차량에 문제가 생기면 연대나 사단에 입고시켜야 했다. 딱히 차량을 정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탓이었다. 그런데 포비가 전입해 온 이후 그런 문제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의 손을 거치면 영 걸리지 않던 시동이 걸리고, 기분 좋은 고양이의 골골송처럼 엔진음이 부드럽게 변했다. 심지어 잠긴 트럭의 문도 땄다! 1그야말로 대대의 에이스였다.
포비는 전역하는 그날까지 나를 살뜰히 챙겼고, 나는 그의 보살핌 속에 무사히 군대에 적응할 수 있었다. ‘에이스의 친구도 역시 에이스!’라는 간부들과 고참들의 터무니없는 믿음 덕도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바른 군 생활과 그가 알려준 이런저런 노하우가 큰 몫을 했다.
전역하고도 가끔 만났다. 포비는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올 때마다 내게 연락했고, 우리는 학창 시절을 추억 삼아 군대에서 있었던 일을 안주 삼아 낄낄대며 술을 마셨다. 그러다 그가 유부남의 대열에 합류하고 직장 문제로 낯선 도시로 이주한 후로 좀처럼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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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동네 뒷산에 올라 같이 막걸리 마시던 친구가 얼마 전 아파트로 이사했다. 볕 좋은 가을의 일요일 오전, 그의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집들이는 뭔 집들이여. 기양 막걸리나 먹자는 거지.” 녀석은 심드렁한 어투로 초대의 말을 건넸지만, 나는 집들이 선물로 뭘 하면 좋을지 몰라 한동안 고민했다.
포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오늘 만남이 집들이를 겸하는 것인지 모를 것이다.
“어디여?”
“어. 나 인제 출발할라구. 너는 벌써 간 겨?”
“아녀. 나도 지금 출발혀. 저기…, 오늘 염생이네 집들이여.”
“그려?”
“어. 올 때 휴지라도 하나 사갖구 와.”
“그려.”
농협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았다. 어떤 게 좋을지 잘 모를 때는 현찰이 최고다. 그래도 빈손으로 가기는 허전해서 하나로 마트에 들러서 세제와 아이들 먹을 과자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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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추우~운!”
아이들이 덥썩 품에 안겼다.
“어이쿠, 이놈들! 삼춘이 뭐여, 삼춘이. 큰아부지~ 혀야지이.”
‘하하하’ 웃는데, 친구가 인상을 찌푸렸다.
“뭘 이런 걸 다 사 오고 그르냐. 그냥 몸만 오라니께. 여보! 일루와봐. 찬새미가 뭘 잔뜩 사 왔어.”
친구의 아내이자 내 동생의 친구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다 말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 내가 몸만 오라 했어, 안 했어!”
“몰러. 때 되믄 오것지.”
포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얘도 양반은 못 된다.
“어디여?”
“나는 막 왔어. 너는?
“벌써? 난 식자재 마트여. 휴지만 사기 좀 그렇잖어. 고기라두 끊어갈까?”
“고기?”
친구와 친구 아내가 손사래를 쳤다.
“야. 새집인데 기름 튀믄 안 되잖어. 허전하믄 휴지나 하나 더 사와.”
“그려. 알었다.”
10분도 안 되어 월 패드가 울렸다. 포비가 도착했다. 그의 아내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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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도 그의 아내도 오랜만이다. 군대 있을 때 가끔 포비를 찾아오던 후배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지금 포비의 아내다. 내가 볼 때는 분명 둘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데, 고백을 못 하고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좋아허냐?”
“몰러.”
“그럼 왜 이 먼 데까지 오라고 한 겨.”
“아니…, 나는 맘이 있는데, 걔가 어떤지 모르겄어.”
“맘이 없는데 이 촌동네까지 잘도 찾아오겄다. 것두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말여.”
“그른가?”
포비의 후배가 면회 온 날,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수줍게 고백했고 ‘오늘부터 1일’ 역사적인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포비에게 편지가 쏟아졌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하루에 서너 통씩 도착하는 편지에 답장은 해야겠는데, 편지지에 ‘지은에게. 안녕?’ 여섯 글자를 쓰면 더는 쓸 말이 생각이 안 났다.
“찬샘아. 죽겄다. 도와줘”
일요일 오전, 다들 종교활동 나가고 부대가 침묵에 잠긴 조용한 시간이면 포비와 머리를 맞대고 편지를 썼다. “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쭉 해봐.” 여자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같이 읽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정리해서 말을 늘어놓으면, 그는 “맞어, 맞어.”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된 한 편의 글을 출력했다. 포비는 모나미 볼펜으로 편지지를 꾹꾹 눌러 글을 옮겼다. 그렇게 주고받은 편지가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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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부침개에 막걸리나 한잔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포비 부부가 방문하는 바람에 자리가 커졌다. 이사 후 첫 손님 방문이라고 친구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차렸다.
시간은 넉넉했고 요리는 맛있었다. 화제는 곳곳으로 튀어서 소싯적 별명의 유래부터 수학여행 때 스트리킹한 사연까지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은 말에 연신 웃음이 터졌다. 자리가 파할 무렵이었다. 포비의 아내가 불만을 토로했다.
“오빠. 우리 지유 아빠 글 잘 쓰잖아요. 알죠? 오빠는 군대도 같이 갔고 그러니까 알잖아요. 지유가 얼마 전에 백일장 준비하느라 글을 썼는데, 글쎄 한 개를 안 봐줘요. ‘잘 썼네.’ 이게 끝이에요. 이이는 대체 왜 그런대요.”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자라잖아요. 그게 좋아요. 무조건 칭찬해 주세요.”
“맞어, 맞어.”
포비가 오래전 그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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